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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 운동권의 역사와 현재 (PGR21글) / 5.18 민주화운동 전개과정 (디시위키) / PD(나무위키)

PurpleGuy101 2022. 5. 11.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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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3/09 13:12:53
Name aurelius
Subject [역사] NL 운동권의 역사와 현재
참고: 역사의 경과를 다루는 내용이지만, 현대사와 정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정치탭으로 올립니다. 


주사파와 NL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왜 이들이 요즘 이렇게 회자되는 것인가? 집권여당 민주당의 핵심세력은 주사파인가? NL이란 도대체 무엇이고, 그들은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가? 



여기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한겨레의 박찬수 씨가 저술한 "NL 현대사"라는 책입니다. 그는 NL의 뿌리와 그 변천 과정을 심도 있게 취재하여 연재하였는데, 이를 단행본으로 엮어 출판한 결과가 앞서 언급한 책입니다. 그 내용을 토대로 이 역사를 대강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1. 반미이념의 태동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반미를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심지어 불경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반공보수 뿐만 아니라 민주화 세력도 미국을 우방국으로 인식했으며, 미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대한민국 땅에서 실현하고자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인식이 급변하게 된 계기가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과 전두환 정권의 학살이었습니다. 


당시 광주 운동권은 미국의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입항한다는 소문을 듣고, 미국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국가이니 자신들을 구해주러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입항했으니 군사독재는 끝났다!"고 외친 사람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사실 대단히 순진한 생각이었고, 어떻게 보면 과거 황사영의 백서 때로 거슬러올라가는 오랜 착각이 계속된 것이었습니다. 황사영 또한 시궁창 같은 조선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청나라와 황제와 교황이 군대를 이끌고 조선정부를 전복해주기를 바랐습니다. 국가간의 이익, 현실주의적 국제정치 등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사고였었고, 오히려 미국이 전두환을 백악관에 초대하는 등의 행위를 보이자 이들은 미국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운동권 세력은 1984년 "예속과 함성"이라는 팸플릿을 제작하고 반포하였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모든 불행과 고통의 근원은 미국에 있다. 미국으로부터 해방되지 않고서는 이 짜증스러운 가난과 정치적 억압과 저질스런 문화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중략) 우리나라의 기본적 모순은 제국주의와 신식민지 간 모순이다. 민주주의를 진정으로 이루려면 매판세력만을 물고 늘어져서는 안 되며 제국주의 세력과 싸워야 하고 미국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학생들은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유행하던 마르크스주의와 반미사상이 결합하여 한국을 반(半) 식민지로 보았고,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 중 으뜸가는 제국으로 규정하였으며 한국을 해방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2. 민족주의와의 융합 


1985년 서울대에는 단재사상연구회라는 언더써클이 결성되었습니다. 이를 주도한 강철서신으로 이름을 알린 김영환이었습니다. 그는 서울법대 82학번으로 같은 서울법대 82학번에는 조국, 나경원, 원희룡 등이 있습니다. 물론 이 세 명은 김영환과 별다른 관련성이 없지만, 당시 서울대 82학번 전후하는 세대가 이른바 NL을 주도하는 핵심 세력으로 부상했습니다. 


아무튼 김영환은 신채호의 민족주의에 영감을 받아 단재사상연구회를 결성하고, 또 구국학생연맹을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반미, 자주, 통일을 강령으로 하는 조직을 리드했습니다. "반제민중민주화운동의 횃불을 들고 민족해봉의 기수로 부활하자"라는 슬로건이 바로 이때 김영환이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3. NL(민족해방, NATIONAL LIBERATION)의 부상


1980년대 중반 서울대에는 다양한 서클이 존재했습니다. 주류 5개 정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농업경제학회, 경제법학회, 국제경제학회 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영환이 이끄는 단재사상연구회가 이들 주류 서클에 정면도전하였고, 현재 학생운동의 분열은 이들 서클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서클이야 말로 "종파주의의 온상"이라고 지목하였으며, 이러한 주장에 당시 많은 학생들이 동조하여 서클들은 스스로 자진해산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억압적 통치에 맞서 학생회는 단일대오를 형성하고 투쟁해야지 여러 서클로 나뉘어지면 분열하고 동력을 상실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게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서클은 본래 토론과 비판의 장이었는데, 서클이 해체되면서 이러한 기능이 사라져버렸고, 학생회는 일사불란함과 목표만 중시하는 경직된 조직으로 변모했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 김영환은 강철이라는 필명으로 이른바 강철서신이라 불린 편지 등을 유포하여 주체사상을 확산시켰는데, 당시 운동권이 신봉하던 주체사상에는 어떤 거창한 이념이나 철학이 없었습니다. 운동권에서 받아들인 주체사상은 철학과 사상으로서의 이념이 아닌, 실천적 지침이었습니다. 특히 품성론이 그러했습니다. 강철서신과 북한방송 녹취록을 받아적었다는 전남대 출신의 한 인사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북한 방송 문건은 사실 내용면에서 그리 큰 감흥은 없었다. 매력적이었던 것은 품성론이었다. 혁명이론보다 의리와 헌신, 성실함이 더 중요하다는 품성론은 충격적이고 감동적이었다." 


요컨대 당시 유행하던 주체사상은 다음과 슬로건이 잘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민 끝, 실천 시작" 


NL의 이념적 기반은 어떤 철학이나 논리가 아닌 감성과 의리였으며 이는 1986년 자주민족투쟁위원회가 반포한 해방선언에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이란 조국과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 적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 운동승리에 대한 강철 같은 신념, 그리고 백전 불굴의 투지로 표현된다" 


4. NL은 모두 주사파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사실 NL 안에서도 약간 노선 차이가 있었습니다. 품성론만으로는 주체사상의 정수를 받아들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조선로동당을 지도부로 인정하고 수령론을 받아들이느냐가 가장 중요한 관건입니다. 이를 두고 NL간의 분열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밖에서 보면 그게 그거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자기들 나름대로는 아주 중요한 차이라고 인식했습니다. 참고로 하태경 의원은 비주사파 NL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진정 주사파 NL이라고 해도, 아니 오히려 진성 주사파 NL이었기 때문에 대놓고 활동하지 않았고, 따라서 누가 진성 주사파 NL이고 비주사 NL이었는지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5. NL은 어떻게 확산되었는가?


1986년 서울대 자연대에서 구국학생연합이 아주 비장한 출범식을 알렸습니다. 100여명의 학생이 모였고,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행사가 시작하기 전까지 모두 눈을 감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행사가 시작되자 누군가 앞에 나와 결성 취지문을 낭독했습니다. 


"한반도는 19세기말부터 분단을 거쳐 지금까지 미국,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점 지배를 당해왔다. 이들의 억압과 독점에 항거하여 분연히 투쟁하다 산화한 선배 순국영령들의 빛나는 전통을 계승하고 (중략) 열혈 애국청년학생들의 민주적 역량을 총집결하여 투쟁할 목적으로 구학련을 결성한다. 구학련 조직원은 첫째 한반도의 분단과 민중을 억압하는 착취하는 원흉으로서의 미제와 그 괴뢰정권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과, 둘째 불요불굴의 투지와, 셋째 필승불패의 신념을 갖고 힘차게 전진하자"


이적단체에 가까운 단체를 결성하는 것치고는 보안이 허술하기 짝이 없었고, 너무 많은 인원을 동원한 나머지 곧 안기부의 감시망에 포착되어 반년도 안되서 해산당했습니다. 


그런데 구학련이 미친 파급효과는 컸습니다. 이들의 존재와 활동이 순식간에 다른 대학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와 비슷한 단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습니다. 고려대의 애국학생회, 연세대의 반미구국학생동맹, 전남대의 반미구국투쟁위원회 등 모두 구학련에 영감을 얻은 단체였습니다. 


또 구학련은 반미와 통일을 전면에 내건 최초의 학생조직으로, 그 이후 학생운동의 슬로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6. NL 출신 80년대 학번의 주류 편입과 전국조직으로 확대


사실 전통적인 PD 운동권과 일부 NL 입장에서 이념적 순수성이란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주류 야당 세력과 손을 잡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이 추구한 것은 혁명이지, 제도권 정치에서 점진적 변화를 꿈꾸는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NL은 애초에 사상적 기반이 그리 뚜렷하지 않았고 현실정치 측면에서 보다 유연했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에 몸을 맡길 수 있었습니다. "파쇼정권 타도"가 아닌 "독재타도"라는 슬로건이 이러한 흐름에서 탄생했고, 또 "미군철수, 자주통일"이 아닌 "호헌철폐"가 슬로건이 된 것도 이러한 흐름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 직후 전대협이 탄생하게 됩니다. 현 통일부 장관 이인영이 전대협 1기 의장이었는데 전대협이 제대로 출범하게 된 것은 1989년 한양대에서였습니다. 한양대 학생회관 4층에 전대협 사무실을 차리게 되었고, 임종석 전 청와대 수석이 당시 전대협 3기 의장을 맡았습니다. 이는 중요한 변화를 알리는 신호였는데, 지금까지 운동권을 주도하던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가 뒤로 물러나고 한양대가 전면에 나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양대 출신 임종석이 전대협 의장이 되고, 한양대에 전대협 사무실이 설치된 것은 운동권 내의 세력이 SKY에서 비SKY로 확대되는 것을 의미했고, 나아가 전대협 4기 의장으로 전남대 출신이 당선되면서 서울에서 비서울로 세력이 확산되었습니다.  


전대협은 "구국의 강철대오"라는 슬로건으로 민주화 이후의 운동권의 핵심세력으로 부상했고 수만명의 학생이 일사불란하게 전대협진군가를 부르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전대협 3기 의장 임종석이 연단에 등장하면 수만명의 학생이 기립해서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을 외치면서 전대협진군가를 불렀는데, 당시 시사저널에 따르면 전대협은 여당과 야당을 다음으로 한국을 움직이는 단체 3위에 등극했다고 합니다. 전경련과 대기업을 제치고 전대협이 3위에 오른 것은 이들의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대협은 내부적으로 단결의식을 고취시켰고, 대외적으로는 조직력과 규율을 드러냈습니다. 


평상시에 10만명의 학생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능력은 실로 가공할만한 것이었습니다. 


7. 1996년 연세대 사태, 그리고 학생운동의 추락 


전대협의 전성기를 이끌던 이인영이나 임종석 등이 현실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하고, 전대협의 주도권이 NL파가 다수를 이끌던 전남대 등으로 넘어가자 전대협은 90년대 초중반 급격한 쇠락을 겪게 됩니다. 1991년 안기부가 전대협의 정책위원회가 전대협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조직이라고 지목하고, 여기에 4개 주사파 그룹이 활동하고 있다고 발표한 것도 쇠락에 일조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계기는 1996년 연세대 사태였습니다. 수천명의 학생이 연세대에서 농성을 했고, 시가전을 방불케하는 지옥도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헬리콥터가 상공에서 날아다니며, 건물의 유리는 모두 깨져버리고, 화염병과 최루탄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리고 진압과정에서 전경이 숨지는 참사도 발생했고, 수천명이 연행되었습니다.


80년대 학번과 달리 새로 학생운동을 주도하게 된 90년대 학번은 현실감각이 결여되었고, 이념적 순수성과 경직된 교조주의에 함몰되었는데 이는 이들이 몰락하게 되는 원인이었습니다. 당시 이들이 외친 구호는 북미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 연방제 통일이었습니다. 전혀 현실성 없고, 국민적 공감대도 형성할 수 없는 구호였지만, 이들은 이를 끝까지 밀고나갔습니다. 


80년대 학번들이 외치던 독재타도는 민주화가 이미 실현된 이상 더 이상 써먹을 수 없는 구호였고, 남북간의 제한적 교류도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가 선제적으로 실행했기 때문에, 이 또한 이들이 내세울 수 있는 구호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더욱 더 순수하고 전면적으로 본인들의 마음 속에 있던 구호를 전면에 내걸었던 것이고 이는 국민들이 이들을 외면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8. 민혁당 사건, 김영환의 전향 그리고 이석기 


1999년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북한 조선로동당과 직접 접선하던 지하 조직 민혁당이 발각되어 이들 주모자들이 체포되었기 때문입니다. 민혁당이 처음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 사건이었으며 김영환이 대중에게 알려진 계기가 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영환은 민혁당을 조직한 당사자였음에도 1999년에 이르면 이미 거의 전향한 상태였고, 그 스스로 자수를 해서 모든 것을 털어놓았습니다. 강철서신으로 80년대 대학가에 주체사상을 보급한 장본인이 전향했다는 사실은 NL 운동권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심지어 김영환이 프락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오늘날 김영환은 북한 뉴스 전문 매체 데일리NK를 창립하고 북한의 민주화 및 탈북자를 지원하는 사업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김영환과 함께 체포대상 명단에는 이석기도 있었습니다. 민혁당은 완전 지하조직으로 운동권도 모르는 비밀조직이었는데, 이석기도 여기에 멤버였던 것입니다. 이석기는 체포를 피해 3년간 도피했는데, 나중에 검거되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 받아 복역했습니다. 


9. 이석기의 부활 그리고 통진당의 해체 


이석기는 복역 후 2005년 선거 기획광고 대행사를 차렸습니다. 이 회사는 서울대를 비롯한 30여개의 대학 총학생회와 동아리 축제 기획 및 홍보사업 등의 계약을 맺어 매출을 올렸습니다. 이제 막 출소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회사를 만들고 조직하고 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2007년 12월에는 무려 25억원의 수입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이 광고/선거 기획사 CN커뮤니케이션즈의 수익이 통합진보당의 당권파(주사파 NL)의 자금줄이 아니었나 하는 의혹이 있습니다. 


심지어 민노당 당시 비상대책위원장과 함께 이석기 어머니 장례식에 조문간 한 인사는 이석기가 비대위원장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이석기가 실세인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한편 그가 통진당 공천에서 비례대표 후보로 당선되자 많은 이들이 의아해했다고 합니다. 다른 일반인들이 전혀 알지 못했던 이석기가 갑툭튀해서 당당히 후보명부에 이름을 올리니까 반발이 심했다고 전해집니다. 


아무튼 이석기는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한편 현역 국회의원이 내란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모두 아는 이야기이니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통진당 안에서 이석기가 이끌던 경기동부연합은 여전히 살아있다고 추정되며, 한 때 13만명의 당원을 보유한 통진당의 잔당들이 누구이며 어디로 갔는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10. 민주당은 주사파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주사파는 아니지만 NL이 다수다. 


본 책이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엄밀히 말하면 주사파라고 보기엔 어렵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즉, 북한 조선로동당의 지령을 받들며 김씨왕조를 옹위하는 의미에서의 주사파는 아니지만, 범 NL 적 세계관과 문화는 공유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서울시 정책보좌관을 지낸 최병천 씨가 과거 본인 페이스북에서 솔직히 고백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당시 그러한 세계관에 물들지 않았던 이는 거의 없었다고. (참고로 최병천 씨는 여전히 민주당 안에서 활동하고 계신데, 주류와는 달리 상당히 글로벌하고 열린 사고를 하시는 분입니다)  


과잉된 민족주의, 반미적 세계관, 그리고 통일에 대한 집착 등은 모두 NL적 세계관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어떤 특별한 논리나 철학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의리"나, "사람중심" 등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철학이 없으니까 두루뭉술한 이야기밖에 할 수 없고, 구성원들은 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의리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문화에서 자란 80년대 학번들은 이러한 자세나 생각을 완전히 체화한 이들로 전혀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진성 주사파였던 민경우의 증언에 따르면 임종석이나 우상호나 이인영이나 모두 사이비 NL이었고, 그저 운동권 얼굴마담이었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뭐 특별한 신념이 있어서 운동한게 아니라 출세하기 위해서 운동했다고 말이죠. 어쩌면 철저히 사익추구하는 집단이었기 때문에 그 시절 전대협이 가장 잘나갔던 것이고, 그 단맛을 누린 이들이 모두 제도권 국회의원이 된 것이 아닐까... 한편 조국의 경우 운동권에 발을 담가보지도 않은 게 운동권 행새하고 있다면서 아주 못마땅하게 보고 있더군요. 


다만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은 과연 진성 주사파, 경기동부연합과 이석기와 관련 있는 이들이 모두 어디로 갔는가, 이들이 어디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이석기는 도대체 어떻게 출소 후 바로 선거/행사 기획사를 차리고 단기간에 25억 매출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인가. 이러한 조직원들은 오늘날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각종 선거운동의 하부조직에서 활동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럼 그 대가, 외교적 용어를 빌리자면 quid pro quo는 무엇인가? 


전향한 김영환, 그리고 수감된 이석기와 같은 거물이 아닌 실제 행동대원들은 과연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 점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고들면 상당히 흥미로운 취재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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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심군
21/03/09 13:22
쉬시는 동안 다른 피지알 회원분들이랑 좋은 말씀 많이 들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뜨와에므와
21/03/09 13:23
nl 주사파 정도면 이미 머리가 깨지신 분들이죠
사상에 뇌가 절여진 인간들...
절인 배추가 생배추로 돌아올 수 없는 것과 비슷함
페미랑도 잘맞을 수 밖에 없는게, 그쪽도 사상에 뇌가 절여진 건 마찬가지라...
일간베스트
21/03/09 13:24
"통진당의 잔당들이 누구이며 어디로 갔는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민중당> 진보당 창단된지 좀 되었어요. 처음 보고 두 눈을 의심했었습니다.
21/03/09 13:27
민중당->진보당의 회원은 3만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13만에서 나머지 10만명은 어떻게 되었나도 관심 갑니다.
일간베스트
21/03/09 13:37
(수정됨) 통진당 내부 구성이 개판이었기 때문에.. 민주노동당 기준으로 계산하시는 것이 맞겠지요. 당시 국참이 대충 만 명이었고 PD가 2 ~ 3만 정도 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현재 정의당이 6만 정도 , 진보당이 3만에 기타 노동당 등등 하면 대충 어떻게 흩어졌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말도 안되는 정당이 아직도 어떻게 유지되는지는 정말 궁금합니다. 누가 탐사보도 진지하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모르긴 몰라도, 많은 분들의 추측처럼 일종의 사이비 종교와 유사한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면 참 슬플 것 같습니다.
21/03/09 14:24
그 말도 안되는 정당을 지배하고 있는 정파가 최근에 민주노총을 먹었죠.
단순히 당원 숫자만 가지고 영향력을 판단할게 아니라, 그 정파 구성원들의 역량이 얼마나 되고 사회적 영향력이 어떤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21/03/09 14:34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노조 민주노총을 진퉁 주사파가 접수한 것을 보고 충격받았습니다.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선출된 양경수가 친이석기파라고 하던데, 이들이 작성한 정세보고서에 아래와 같은 문단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2월 5일 민주노총 정기대의원대회 <2021년 정세전망>에는 ‘한반도 정세의 격화와 국내정치의 불안정’이라는 소제목 아래 사뭇 놀라운 내용이 들어갔다. 다음 문구다. “자력갱생, 핵무력 완성으로 맞서는 북한 – 북한은 8차 당대회를 통해 대북 적대정책의 철회 없이는 대화와 협상에 연연하지 않고 자력갱생으로 제재를 돌파하며 미국에 대해 선대선 강대강의 원칙으로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심지어 이를 비판하고 알린 매체는 찐 좌파 매체인 레디앙....
안철수
21/03/09 13:31
당시 안기부, 경찰에서 대공 업무한 사람들도 비슷한 이야기하죠.
소위 찐 운동권 투사들 대부분은 맞아서 병신됐거나 민주화 이후 소식이 없는데 사지 멀쩡하고 입으로만 운동한 사짜들이 국회의원하고 청와대 들어가있다고.
아린어린이
21/03/09 13:31
81년생으로 외대 입학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선배 따라 갔다가 학을뗐었죠.
대놓고 북한이 더 행복하다 고 교육하던데요.
제가 아니 수만명이 굶는데 뭐가 행복하냐고 물으니 거짓정보에 세뇌당한거라고, 니가 북에 가봤냐고...
속으로 너는 가봤냐? KBS도 조작이고 BBC도 조작이면 니가 본 정보는 왜 조작이 아니냐 등등 하고푼 말이 많았지만 그냥 아 네 그러고 그쪽을 멀리 했습니다.
당장 이천년대에도 저러던 조직이 있었는데 80 90 대는 더 했겠죠.
태정태세비욘세
21/03/09 15:19
운동권 형들 중에서도
탈출은 지능순으로 하더라구요
21/03/09 13:34
제가 알기로 84년 당시 학생운동의 주류 이념은 마르크스주의라기보다는 세계체계분석이었습니다.
반식민지나 종속 등의 어휘도 거기로부터 유래하지요.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대학가에 널리 퍼진 것은 85년이 기원으로(물론 1~2년의 오차야 당연히 있겠습니다만)
당시 학생운동 커리큘럼을 봐도 약 85년부터 마르크스주의 커리큘럼이 등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 한 회고록에서 본 것이라 조금 가물가물 하네요.

또한 초기 사회구성체 논쟁의 쟁점 중 하나는 한국에서 '종속'과 '식민지'와 같은 담론(세계체계분석적 개념)이 무차별적으로 남용된다는 것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판이었고 거칠게 보면 이것이 nl과 pd의 분화계기 중 하나가 됩니다.
이러한 논쟁은 85년에서 87년을 거치며 발생했고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학생운동 내부에서 마르크스주의가 헤게모니를 잡은 것은 80년대 후반으로 보는게 맞을 것 같습니다. 아니 사실 헤게모니를 잡은 적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거 같기도 합니다.

지금 자료가 없어서 확신은 없지만 대강은 맞을 겁니다.
도들도들
21/03/09 14:45
사구체 논쟁 오랜만에 듣네요 크크.
1980년대에는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과 남미의 종속이론이 풍미했었죠. 마르크스주의는 학생운동의 주류가 된 적이 없었던 게 맞구요.
마르크스레닌주의였던 학연-전학협, 마오-알튀세주의였던 대장정-연대회의, 트로츠키주의였던 다함께, 그람시주의였던 21세기 모두 항상 학생운동의 비주류였고, 언제나 학생운동의 주류는 NL이었습니다. 청년좌파엘리트의 주류 정치사조가 민족주의였다는 것도 분단국가의 비극이라면 비극이겠네요.
21/03/09 15:32
가끔 NL친구들이야 말로 그들이 말하는 분단모순으로 인한 사회의 불구화를 몸으로 체현하는 것 아닌가 그런 슬픈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역설적 의미에서 그들이 맞았고 지금도 그걸 증명하는 중일지도 몰라요. 말씀하신대로 비극이죠...
이라세오날
21/03/09 13:39
5번까지의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다만 6번부터 사실과 의견이 섞이면서 조금 의아한 부분도 있습니다만 글쓴이의 의견이니 차치하고
굵은 표시한 부분에서 사실과 의견이 섞여있는데 솔직히 좀 교묘한 글쓰기인 것 같습니다.
이라세오날
21/03/09 13:52
내가 쓴 댓글이지만 두번째와 세번째 줄의 모순은 무엇인가!

남겨놓겠습니다.
스칼렛
21/03/09 15:10
아까 윤미향 글도 그렇고 사실과 의견을 교묘히 섞어 가진 근거 이상의 결론을 암시하시는게 좀 그렇죠. 마지막은 암시도 아니고 거의 딥스테이트 음모론마냥 급발진하시네요. 민주당에 실망하신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변할 필요는 없으시다고 봅니다만 아쉽네요.
훈수둘팔자
21/03/09 13:41
NL은 정파를 막론하고 절대 정치판에 발도 못 붙이게 해야 합니다.
시대착오적에 꼰대에 내로남불에 성적인 추악함까지 진짜 안좋은 건 다 갖췄어요.
21/03/09 13:43
한달 전 쯤 학교커뮤니티에서 본 글인데 아우렐리우스님 작품이었나보군요.
21/03/09 13:44
제 아버지랑 외삼촌은 위장취업했던 운동권 겪으시고는 운동권이면 어떤 당이든 신뢰 안 하시더라고요. 외삼촌은 작지 않은 기업 노조위원장까지 했음에도 그들의 선민의식,이중잣대에 아주 질리신;
가라한
21/03/09 13:44
본문의 주 주제와는 약간 동떨어져 있지만 처음 언급하신대로 광범위한 반미는 광주의 피와 전두환을 지지한 미국 때문에 만들어진거죠.
'친미 = 애국'인 태극기 부대가 신처럼 숭앙하는 박정희가 사실 반미 주의자였다는 걸 아시는 분을 별로 없는 듯 해요. 왜냐하면 수시로 민주주의 하라고 압박이 들어오니까.... 야당 탄압 그만해라.... 안 그러면 주한 미군 철수할거라고 협박도 하고...
전두환 이전은 정권과 군부가 반미, 야당과 시민 세력이 친미였죠.

이걸 홀랑 뒤집은 게 전두환의 쿠데타와 광주에서 학살 묵인(여기까지는 민주당 카터), 이 후 공화당 레이건은 초선 재선 이 후 거의 제일 먼저 전두환을 방미 초청했고..... 민주주의의 수호자란 게 허울 뿐이고 사실은 부려먹기 편한 독재자가 좋다는 걸 대놓고 만방에 과시했으니 지식과 학생 계층이 반미로 돌아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던 것....

80년대에 고등학교 때 공부만 했던 순수한 대학생일 수록 광주 비디오 한 번 보고 열혈 운동권이 되었다던데... 본문 내용 처럼 운동권이 무슨 거창한 이론이 있던게 아니라 사실 거대한 공포인 군사 정권에 인생을 걸고 대항하려 위해 뭔가 자신을 반쯤 미치게 만들어 줄 어떤게 필요했던 게 아닌가 싶네요.
어찌 보면 시대가 낳은 비극이죠.
21/03/09 13:46
30여년 전 과거에 머물러 현재를 살고 있으신 것 같네요. 흐흐
96년 연대에도 있었고, 98년 한양대에도 있었던 소위 한총련(?) 학우였지만 지금은 자본주의에 잘 적응되어 살고 있네요.
진성 주사파(?)였던 사람의 일개 의견으로 이인영, 우상호, 임종석 등은 졸지에 운동권 얼굴마담에 사이비NL이 되버리네요.
야 세상 참 편하고 쉽게 사네요. 부러워요.
Davi4ever
21/03/09 13:46
글쎄요, 지금의 민주당을 "NL이 다수"라고 판단하신다면 잘못 보시는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렇게 단순한 구조는 아니에요 지금의 민주당은.
21/03/09 14:15
(수정됨) 청와대 전현직 포함 리스트입니다.

임종석 (비서실장, 전대협 3기 의장, 임수경 방북사건 주도)
신동호 (연설비서관, 전대협 문화국장)
백원우 (민정비서관, 전대협 2기 연대사업국장)
한병도 (정무비서관, 전대협 3기 전북 조국통일위원장)
유행렬(자치분권비서관실 행정관, 전대협 3기 중앙위원, 충북대 총학생회장)
윤건영(국정상황실장, 국민대 총학생회장)
송인배(제1부속실장, 부산대 총학생회장)
유송화(제2부속실장, 민청련 조직부장, 이화여대 총학생회장 ,8.15 남북청년 학생회담 투쟁 경력)
하승창 (사회혁신수속, '90년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 사건 구속)
진성준(정무기획비서관, 전북대 총학생회장, 3년6개월 투옥)
김금옥(시민사회비서관, 전북대 총여학생회장)
조한기(의전비서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한명숙 보좌관)
권혁기(춘추관장, 국민대 총학생회장)
오종식(정무기획비서관실 선임행정관, 고려대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
Davi4ever
21/03/09 14:21
음, 제가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 것 같네요. 저는 글에서 통진당 당원 몇만 명 이런 이야기를 하셔서
글에서 쓰신 민주당을 '당원 및 지지자'를 포함한 포괄적인 형태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NL이 다수"라고 단순하게 쓰신 것에 공감하지 못했고요.
21/03/09 14:25
물론 당원 및 지지자는 엄청 다양한 계층이 있지요. 다만 실제 권력의 핵심이 어디에 위치해있는가를 보는 게 중요한 거 같습니다. 민주당에는 이용우 의원처럼 현대그룹 출신 기업가도 있고, 양향자처럼 삼성출신도 있고, 또 의원은 아니지만 전통적 리버럴이라고 할 수 있는 최병천 보좌관 같은 분도 계시지요. 그런데 그들 모두 권력의 이너서클에 들지 못하고 있다는 현 청와대의 민주당의 현실. 청와대의 구성원들과 김태년과 이인영 등을 보면 운동권 세력의 사실상 권력 독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Davi4ever
21/03/09 14:31
(수정됨) 10번의 문장은 "NL이 다수"보다는 "NL이 주류"라는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되겠군요.
의도하신 것보다 문장이 자극적으로 느껴지기는 합니다... 어쨌든 어떤 뜻으로 쓰신 건지 이해했습니다.
21/03/09 14:50
너무 사례들을 체리피킹 하시는데, 단적으로 비서실장만 생각해 볼까요? 임종석-노영민-유영민 세명인데 NL-PD-기업인 출신이죠. 임종석은 NL이니까 이너서클이고 나머지 둘은 비서실장이긴 했지만 허수아비인건가요? NL출신이 상대적으로 많을 수는 있겠죠. 운동권 시절에도 다수파였으니까요. 근데 그게 이너서클로 이어진다는 결론은 너무 비약이죠.
유료도로당
21/03/09 16:22
그런식으로 학생때 총학 직함만 적어놓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총학 출신이면 전부 다 NL인가요? 아닌걸로 알고있는데... 학번에 따라서도 되게 다른 느낌일거고.
크라피카
21/03/09 13:51
근본없는 친북 운동권들의 기원을 잘 써주셨네요. 대학 입학했을 때 이 정신나간 머저리들은 뭐지 했었는데
DownTeamisDown
21/03/09 13:51
민주당에서 NL 이라고 할만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NL 출신이었다 라던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어느정도 있고 지금도 NL 이라고 할만한 사람들은 소수 있을텐데 말이죠.
특히 90년대 중반 이후에 대학을 나온 쪽 같은경우에는 진보계열(통진당이라던지 말이죠) 아닌이상 학생회하고 그리 연관성이 높은게 아니라서 더더욱 그래요.

그리고 13만 통진당이긴 하지만 숫자 채우던 반수는 국참당 계열이고 나머지서 반정도는 PD 계열이라고 봐야하니까... 주사파 NL은 3만정도 되는게 맞는것 같습니다.
모리건 앤슬랜드
21/03/09 14:11
80년대 대학생들이 천지분간 못하고 너무 나이브했던거죠. 자기들이 틀린걸 인정 못하고 그들만의 세계라는 한계와 알을 깨고 나왔어아 하는데 지들 대가리를 깨버리고 자기들만의 껍질을 공고하게 만든
21/03/09 14:11
'경기동부연합과 이석기와 관련 있는 이들이 모두 어디로 갔는가'

글쎄 뭐 딱히 어디로 간건 아니고 그냥 잘 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 각종 영리/비영리 단체, 노동조합, 대중조직 등등 변함없이 그대로 하고 있죠. 말씀하신 '선거운동의 하부조직'으로도 당연히 기능합니다.
그런 사람들 중 자신이 특정 정파에 소속되었다는 자각, 자신이 혁명가라는 자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경기동부'등과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고, 그쪽 사람들은 주로 '진보정당운동' 및 '민주노조운동'에 직접적으로 속한, 그 안에서 활동가로서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비중이 많습니다. 요즘은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학생운동이 노조보다도 메인이었구요. 전체 운동의 여러 정파 중 하나에서 수장의 지위에 있던게 이석기니 학생 쪽 선거 관련 매출만해도 상당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외의 사람들. 인적으로는 훨씬 더 다수가 되겠죠. 진보정당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경우가 더 많겠구요. 상황에 따라 관련이 있을때도 있고, 상황이 바뀌면 관련이 없어지기도 하는 식으로 유동적이죠.
파편적으로 존재하는 다수의 개인들도 많고, 각종 사업을 하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죠. 일찌감치 정치권으로 가서 말단에서부터 경력을 쌓은 사람들도 이에 해당되구요.
과거에는 정파 구성원이라는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가 2000년대의 진보정당운동에는 참가하지 않았던 분들의 숫자도 상당할 것으로 추측됩니다.
과거에 핵심 활동가였던 분들의 경우에는 이념은 많이 사라지고 사적인 인맥만 남은 경우들이 많을 것이고, 이념이 전혀 사라지지 않았지만 진보정당에는 참가하지 않은 케이스들도 꽤 있을겁니다. 정치권에도 보좌관 등으로 꽤 있을거구요.
과거에 핵심 활동가가 아니었던 경우에는 이념이랄게 크게 있지 않았으니 사라질것도 별로 없고, 그냥 약간 전체주의 느낌이 나는 민주주의관과 민족주의 정도만 남아있다고 봐야죠. 지금은 그저 nl의 주변 인맥으로서 광의의 민주진보진영 세력권에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내면에서는 이념이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척 하는 경우도 있겠죠. 이게 각종 사회적 문제와 관련해서는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제는 '그쪽 바닥'이라고만 한정할 수 없을 정도로, 사실상 사회 전체가 그 무대가 되어있다고 볼 수 있죠.

진보정당 당원이 몇명이었는데 어디서 어떻게 이동하고 어쩌구 하는건 지엽적인 것에 불과해 보입니다. 당원들이 들으면 기분나쁘실지 모르겠으나, 제가 보기에 정당이라는건 그냥 외피에 불과합니다. 당은 없어질수도 있고 쪼개질수도 있고 하는거죠.
21/03/09 14:20
[한편 조국의 경우 운동권에 발을 담가보지도 않은 게 운동권 행새하고 있다면서] 이건 NL의 관점이고, 민주당 내에 PD계 대표주자로는 조국(당원은 아닙니다만) 송영길 은수미 박용진 등이 있죠.

그냥 운동 하던 사람중에 정파성 약하거나 약하게 돌아선, 좀 더 민주화 자체에 방점을 찍은 사람들이 진보정당쪽으로 계속 안하고 DJ나 노무현 등에 의해 민주당에 들어왔고 대충 섞이면서 주류가 되었다 이렇게 봐야 할 것 같고, 민주당 내에서 NL PD 구분하는건 현재 역학구도를 분석하는데에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개개인 정치인들의 어떤 사고의 옅은 프레임웍으로 작동할 수는 있지만 조직은 이미 형해화되었거든요.

피지알에도 운동권 전문가 자처하시면서 실제랑 하나도 안맞는 얘기만 하는 분이 종종 계십니다만, NL이 어딘가에서 암약하고 있고 민주당의 흑막이고 딥스테이트처럼 국정을 조정하고 있다 이런 세계관에 너무 몰입하시면 현실감각이 떨어지고 실제와는 괴리가 있는 분석만 나오게 됩니다. 냉철한 현실감각이 없이는 민주당 정권을 무너트리는 데에도 도움이 안돼요.
21/03/09 14:23
책에 관련해서는 한마디만 쓰자면 재미있습니다. 아직 접하지 못한 분들께 추천드리구요.

그리고 청와대나 민주당이 NL 다수인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봅니다. 채도가 강한 단일색상이라기보다는, 여러 입장과 단체가 섞이고 각자의 권력욕 세속욕 등이 겹치면서 비유하자면 그라데이션 정도가 된 것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아요. 물론 거칠게 보면 일정한 색상군으로 볼 수도 있겠죠.
죽력고
21/03/09 14:29
저도 사회과학대를 나왔고, 거의 소위 운동권 막바지였죠. 그때만 해도 단과대도 단과대였던지라 여전히 운동권 색채가 진했습니다.
학기초 단과대 행사에서 한총련 진군가가 울려퍼졌었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퍼킹 USA를 부른 가수를 초대가수로 부르질 않나, 효순이미선이 사건 터졌을때는 그 시체사진을 여과없이 단과대에 전시했다가 항의받고 겨우 가린 적도 있었구요. 저도 저쪽에 살짝이나마 발을 걸쳐본적도 있고(풍물패 생활을 했었습니다)... 다만 성향이 좀 반골에 가깝긴 했었죠.
풍물패 합숙때 한총련에 관한 교육(당연히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방향으로...)이 있었는데 한총련이 97년 프락치로 오인해서 무고한 시민을 죽음에 이르게 한 그 사건을 입밖으로 꺼낸 저도 지금 보면 전사의 심장을 가졌지 않았나 싶습니다.
세인트
21/03/09 15:07
저도 사회과학대에 시사OOO동아리 출신이고 선배따라 온갖 집회 다 나가보고 통선대까지 해봤는데
01년도 한총련 출범식을 저희 학교에서 준비하면서 선배들 모습에 너무 실망하고 결정적으로 학생회 학교 선배님 성추행 사건 터지고
암튼 그러면서 맘이 돌아설 때쯤 동아리에서 '김정일이 그렇게 대단한 놈이냐 그냥 독재자 아들 아니냐' 했다가
선배한테 뺨맞고 쌍욕먹은 기억이 문득 드는군요 흐흐.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덕분(?)에 정신 차리게 되었으니 고맙다고 해야 될런지 끌끌...
21/03/09 14:35
본문글은 출신과 배경에 대해서는 꽤 잘 설명하고 있지만, 현재를 잘 설명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어요. 저런 배경을 현재까지 연결시키려면 결국 배후의 '보이지 않는 손' 논리로 이어지거든요. 아직까지 저들 뒤에서 암약하고 있는 뭔가가 있다......

그게 아니라 지금 저들이 뭉치고 있는 이유는 그게 세속적으로 이득이 되니까, 입니다.
김재규열사
21/03/09 14:44
30년전 그들의 사상을 가지고 현재를 평가하는데는 부정적입니다. 다만 [범 NL 적 세계관과 문화는 공유]한다는 대목은 동감합니다. 다만 이걸 특별하게 볼 필요는 없을 겁니다.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체험과 지식을 가지고 이후 30년 40년을 사는 게 특별한 일도 아니고요.
그리고 이석기를 지지했던 통진당 13만 당원 중에 이석기의 세계관에 동의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현재 정의당이 됐고, 이석기의 세계관에 동의했던 사람들의 일부는 현재 민중당-진보당 이쪽 라인에 있습니다. 이들이 또 백두칭송위원회 등 대학생 단체와 한몸이냐 하시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친문'이라고 해도 운동권 시절 출신배경이나 인맥에 따라 다양하게 나뉘는 것처럼 NL중에서도 아직도 찐 NL인 사람들도 이래저래 계파가 복잡하죠.
21/03/09 15:23
종교도 수틀리면 개종하는 판에, 한번 NL은 영원한 NL이라는 법 있나요, 젊은 혈기에 몸담았다가 슬그머니 빠져나올 수도 있고, 변절할 수도 있는거죠.
극단적인 예로 김문수 같은 사람도 있고요. 김문수가 한때 운동권의 영웅이었다고 해서 지금 김문수를 좌파로 구분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리고 그당시 NL이던 사람들도 정치권에 들어온 이후로는 그냥 탐욕만 가득한 정치인 1인이 된 경우도 많을겁니다.
사람의 사상이란 생각보다 쉽게 바뀌죠. 특히나 그게 현실의 이익과 충돌할 때는 더욱 더...
이스칸다르
21/03/09 16:01
나무에 못을 박았다가 뽑아도 그 흔적은 남아 있습니다.
하물며, 사람이 10년 이상 어떠한 사상 (사이비든 아니든 관계없이)에 빠져서 온 생을 바쳤다면, 그것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었어도 빠져나오기 힘들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래서 그 사상이 틀린 것을 알고서도 안 빠져 나오는 것은 해당 개인의 생각이니 마음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이 바라 만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가 개인의 영역이 아닌 공적인 영역으로 기어나와서 틀린 사상을 세상에 반영하려고 하면 [두들겨 패서 내쫓아야 합니다]
바로 nl 과 종북 주사파와 빨갱이들을 상대할 때 이야기입니다.
유료도로당
21/03/09 16:24
아랫글에 이어서 이 글까지, [민주당 애들은 아무래도 빨갱이들인것 같다] 라는 원색적인 문장을 돌려돌려 아주 고상하게 말하고 계신것 같다는 느낌은 저만 받는 것인가요? 흑화를 하셔도 색깔론까지 가시는건 너무 나가시는것 같은데...

그리고 9번까지 책 내용(NL의 역사)과 10번의 내용(현재 민주당과 NL의 관계)은 연결이 안 되는것 같아요. 그냥 다른얘기 하시는것 같아서...
시니스터
21/03/09 16:49
LunaseA님 해석정도가 맞다고 봅니다
21/03/09 17:27
위에서 얘기했듯, '내면에서는 이념이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척 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지금 주류를 형성한것으로 생각합니다.

권력과 이권이 있는 곳마다 자신이 자주민주통일 동지임을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나는거죠.
그런데 그들이 실제 주사파일리가 있겠습니까. 대부분은 그냥 그걸 치장으로 삼는거고, 서로가 주사파가 아니라는걸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끼리도 서로 잘 알겠죠.
근데 실제 주사파가 아니건 말건 지들이 그렇게 보이고 싶어하면 그거 주사파라고 쳐줘야죠. 지들이 그렇게 주장하는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굳이 걔네 주사파 아니라고 해석(?)해줄 필요가 있나요.

그리고 '이념이 전혀 사라지지 않았지만 진보정당에는 참가하지 않은' 유형의 사람들은 정말 위험한 부류입니다.
17대였나 18대였나.. 아마 국회의장 비서관이었나.. 주사파 조직원인 사건이 있었죠.
이낙연 보좌관이 우리민족끼리 팔로우한게 드러난 경우도 있는데, 이건 위의 사건과는 달리 그냥 사소한 문제고 개인의 정치적 취향에 불과한 것이지만, 어쨌든 사상적으로는 대충 비슷한 부류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정치권 뿐만 아니라 언론이며 공무원이며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번에 교과서 무단수정하고 징역형 받은 것도 보나마나 그쪽이겠죠.
그들 스스로는 '신념을 순수하게 지키고 있다'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고는 있겠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번째 얘기한 사람들. 즉 운동경력이 있음을 하나의 신분으로 삼아 이권을 추구하는 쪽에 해당되겠지만, 현직 주사파의 입김 또한 사회 각계각층 및 정치권 주류에서 충분히 작용하고 있을수는 있습니다.
예컨데 이번에 한미연합훈련 중단시도가 있었습니다. 먼저 정의당이 결의안을 발의하며 물꼬를 텄는데, 정의당이야 원래 그쪽이고 정치권에서 비주류죠. 그런데 윤미향, 김남국을 비롯한 민주당 35인이 그에 호응하는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그런데 그 35인이 설마 주사파겠습니까. 아마도 그 중 34인은 그냥 북한에 대해 감상적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는 정도의 민족주의자에 불과하겠죠.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건 '현직'의 입김에 휘둘린것으로 보입니다.
강가딘
21/03/09 17:00
(수정됨) 7-8년전쯤 제가 장애인극단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교류하던 극단중에 운동권계열 출신들이 하는 극단이 있었죠
교류하면서 친하게 된 누나가 같이 가자고 해서 몇번 6,15 통일대회 같은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었는데
얼마 후에 극단 구성원 간의 노선 차이로 그 극단이 와해되더군요
근데 와해 된 내용이 민노당에서 NL이 PD를 몰아내는거랑 비슷하게 흘러갔죠
그걸 보면서 NL를 제대로 보게 되었죠
어니닷
21/03/09 17:44
그간 aurelius님의 글들을 잘 읽어왔는데,
그동안은 컨셉을 잡아오신거고 이 글이 진짜 하고 싶었던 애기신건지
아니면 현 정권에 대한 실망(자유주의적 관점에서)에서 흑화하신건지 궁금하네요.
예전글들의 그 현실적이면서 나름 통찰력있던, 사람에 따라선 동의 여부가 갈릴 수 있지만 나름 일관성 있던 관점과 논리가 있던 것들은 어디로 가고
철지난 유투브 장사꾼들(유재일 같은)이나 소리지르던 안주거리를 aurelius님 글에서 보다니 씁쓸합니다.

이 글은 이 한마디면 반박됩니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아세요?
21/03/09 17:50
흑화가 아니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고 있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리버럴 정당이라고 생각했던 민주당이 지금까지 보여주고 있는 행태의 근원이 무엇일까 추적하다보니 결국은 운동권과 그 세계관 그리고 그들의 집단 행동논리로 귀결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가짜 민주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참칭했던 것이죠. 그리고 저들의 사유재산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관념과 기본적인 역사관을 다시 추적하다보니,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민족해방파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제서야 저들의 행동과 언사가 이해되기 시작했지요.
이선화
21/03/09 18:38
즉, [알고보니 빨갱이들이었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건가요? 점점 더 실망이 커지네요.
21/03/09 18:39
네 실망은 개인 자유의 영역입니다. 다만 존재하는 현상을 없는 것 취급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1/03/09 22:19
현실을 부정하지마셔요~ 그러다 민주당 지지자 꼴 됩니다
Roads go ever on
21/03/09 22:38
민주당이 빨갱이니, 색깔론 얘기하는 글이 아니죠. NL과 주사파의 형성과정과 그 시기에 청년기를 보낸 사람들이 다수 있기 때문에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명박 시기에 고소영 얘기하면서 소망교회 라인이 문제시 됐던 것과 비슷하다고 봅니다. 교회에 비해 운동권은 신천지 같은 느낌이라 사고의 경직성, 영향력 측면에서 보면 운동권이 더 문제가 심하죠. 게다가 적극적으로 사익과 권력을 추구하고 있고요.
답이머얌
21/03/09 19:26
(수정됨) 딱 보니까 80년대 대학다녔으면 비판하는 그 행색 그대로 따라하고 있을만한 수준이군요.

원래 근친 증오가 제일 무섭죠. 거울이 자기를 비추고 있으니.

그들로 인해 글쓴님이 이만큼 떠들수 있는 사실은 철저히 외면한 채 말이죠.

뭐든 인간이 하는 일에 명과 암이 있죠. 하다못해 박정희도 공과를 놓고 말이 많은데, 하나의 단체(수많은 사람으로 구성된)가 해온 일들이 분명한 명과 암이 존재하는데, 그 사람들 모두를 쓰레기 해악급 인간으로만 취급하려하니 말이죠.

마치 운동권이 세상을 선과 악의 (또는 모순) 대결장으로 미국을 몰아치던 그 모습 그대로군요.
21/03/09 19:44
과거에는 일부 긍정적 역할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평가할만한 점이 있죠.
그러나 그건 과거의 얘기일 뿐입니다. 현 시대에서는 해악 외에 아무런 기능을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답이머얌
21/03/09 19:50
그래서 구체적으로 현재 그들이 끼치고 있는 해악이 뭘까요?
21/03/09 19:53
구체적으로 아주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답이머얌
21/03/09 20:06
그러니까 뭘까요?

80년대 대학생들치고 운동권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요즘 말로 아싸라 불리는 소수 빼고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루어낸 사회가 현재 대한민국 사회죠. 비록 586꼰대란 소리야 듣지만 아쨌거나 선대에서부터 내려온 발전과 번영을 계속 이어가고 있죠. 선대에서 힘들었던 정치적 문화적 자유도 선대와 비교해서 분명한 발전이 있었구요.

박정희처럼 명과 암을 나눈다면 적어도 좀 더 나은 위치가 아닐까 싶어요.

운동권이 아니라 세대 얘기가 되어버렸는데, 그 선두에 운동권이 존재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죠.

마치 박정희 치하 58년 개띠들처럼 말이죠. 그 선두에는 박정희와 군부정권이 있었듯.

대체 구체적으로 많은게 뭘까요?
21/03/09 20:42
너무나도 여러가지 것들이 있지만,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관련해서 좀 심각한것 같습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와 워낙 거리가 먼 사상과 습속을 가진 분들이라 현실과 괴리가 발생하고 있는듯 합니다.
답이머얌
21/03/09 20:46
그러니까 암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이걸 가지고 공격하는건 어떤 집단이건 다 악의 화신으로 만들수 있죠.

책을 많이 읽고 남에게 소개해줄 정도의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 이런 식으로 편협된 사고를 하는걸 보면 제가 애초 했던 생각, 80년대 태어났으면 바로 그 순수 악이 되었을 거란 생각이 안들수 없거든요.
소독용 에탄올
21/03/09 22:24
민주주의랑 법치주의 관련해선 운동권이 문제인게 아니라 80년대에 대학생일 수 있는 연령대 쪽이 문제 아닐까요.....
운동권 했건 안했건 간에 그 연배에서 사회화된 분들이 민주주의랑 법치주의에 대해 현재수준의 인식을 체화하지 못한게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요.
21/03/09 20:54
(수정됨)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 사회가 만들어진건 8~90년대 경제성장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봅니다.

문화 또한 그게 가장 크고, 거기에 운동권의 기여도는 거의 없는것 같습니다. 운동권이 한건 민중적/민족적 문화예술같은거고, 당시로서도 존재가치는 거의 없었던것 같습니다. 그냥 개성있는 하나의 장르로서의 의미 정도밖에는요. 좋게 말해 민중적/민족적이지, 나쁘게 말하면 그냥 파시스트 문화예술입니다. 그외 각종 유의미한 문화적 산물은 운동권과 대립되는 느낌의 젊은층에 의해 대부분 만들어졌죠.

정치 관련해서 본다면 직선제 개헌 및 전반적인 인권 향상 등에는 기여도가 어느정도 있다고 볼 수 있을텐데, 그것도 운동권의 역할이 가장 컸는지는 의문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상황50% + 기여도 50%정도 느낌이라고 하는게 적절한것 같습니다.
그 상황이라는 것에는 지정학적 상황이 가장 클거고, 한편으로 한국은 일단 명목상으로는 자유주의를 지향했었던것도 있습니다. 군부독재가 상당한 걸림돌이기는 했으나 기본 토양 자체는 있었습니다. 아주 옛날 4.19때 사람들도 자유민주주의가 뭔지는 알고는 있었죠.
그런데 그 운동권 중에서는 70년대에 주력이었던 사람들이 80년대 학생운동권보다는 좀 더 기여도가 높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87년 한해로만 한정해서 본다면 학생쪽의 기여도가 조금은 더 높을 것이구요. 그 이후의 학생운동권은 사회에 기여도가 아무것도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것 같구요. 기여도는 커녕 이미 80년대 후반부터도 해악이 많이 발생하고 있었다고 봐야할것 같네요. 90년대 중반쯤 가면 사회악 이외의 의미는 없는것 같구요. 80년대 후반 내지는 90년대 초반까지는 나름대로 적절한 대중노선, 나쁘게 말하면 정체를 잘 감추는 노선을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로서 가장 똑똑한 애들이 유입되던 시기라 뭔가를 만들어낼 만한 능력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90년대 초반을 지나는 동안 시대상황이 바뀌며 거대한 조직을 유지하는데만 급급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이념에 근본적으로 내재된 전체주의가 본격적으로 실체화되며 90년대 중반쯤 되어서는 정체를 숨기지 못하는 종교집단화되는 지경에 이릅니다.
답이머얌
21/03/09 21:27
경제 쪽은 그냥 국민의 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시대건 구분없이 말이죠. 비인간적인 처우에도 상관없이 이악물고 일한 세대, 바로 최근까지도 그랬고 일부는 현재 진행형이죠. 게다가 국가가 마당히 해야할 인력 수급도, 자신의 월급을 갈아넣으면서 사교육으로 무장시켜 사회에 훌륭한 제품(?)을 내놓았죠. 딱히 80~90년대라고 한정지을 필요 없이요.

문화는 그냥 미국 일본의 섞어찌개 강화판이라 봅니다. 어차피 우리나라처럼 강한 종속성을 가지 문화권은 그렇게 발전하는거죠. 그걸 꼭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보고요. 운동권의 영향이 없다고 해도 그게 운동권이 쓰레기 취급당할 근거는 아니라고 봅니다.

정치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현재까지 이루어진 87체제는 결정적으로 운동권의(+재야) 힘이죠. 야당이 암만 악악거려봐야 용팔이 사건이나 각종 프락치 사건, 양김의 반목 등에서 볼때 운동권의 움직임이 없었다면 절대로 탄생할 수 없었던 것이었죠.

게다가 광주학살이 가능했던 건 미국 묵인이라는 인식 때문에 반미 정서가 불같이 일어났고, 이러한 반면교사 때문에 87년엔 미국이 전두환에게 심한 압박을 줄 수 있었죠.

90년대 이후 운동권에 대한 평가는 그렇죠. 99% 인정합니다.

근데 얘들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무슨 사고를 친다는 거죠? 이석기, 윤미향 모두 영향력 없죠, 욕이나 쳐먹고 있지. 국회의원이 대단한 것 같지만 299명 중의 한명이죠. 무슨 교섭단체 (민주당의 경우는 계파 보스) 수준의 영향력도 아니고 말이죠.

그냥 사회 기생충 수준이라고 봅니다. 이건 어떤 사회건 없앨수 없어요. 조폭처럼 그냥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관리하는 수준으로 가야죠.

극소수죠. 무슨 10만명이 어디가서 뭐하냐 식의 남로당 환상 꿈꾸는 분 보면 한심해 죽겠어요.
21/03/09 21:52
(수정됨) 최근 수년새 문재인 정권이 비판받고 있는 문제들은 대부분 그 '무슨 사고'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그 문제 중 특히 심각한 것들은 과거 김대중, 노무현 시절에는 없었던 종류의 것들입니다. 당시 주류였던 70년대 출신들이 2010년대 들어 퇴장하고 그 다음 세대가 주류가 된 것이 사고의 원인인듯 합니다.
답이머얌
21/03/09 22:27
그냥 기득권 위치에 올라선 신진세력 중에서 쭉정이들이라 생각합니다. 세대 교체되면서 나오는 잡음이죠. 그리고 시대가 변하면서 새롭게 형성되는 사고(예를 들어 성희롱)도 있고 말이죠. 이정도로 나라가 흔들리거나 국민과 국가간의 신뢰관계가 깨진다고 보진 않아요.

이러한 각종 사고는 역시 없을수 없고, 관리해야할 수준이라고 봐요. 누가 집권하건 부정부패나 후안무치로 욕먹는 소수는 있었잖아요. 형태가 시대에 따라 달리 보일 분이죠.

문정권의 가장 큰 실패는 부동산과 검찰개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건 정책 실패라고 봐야지 운동권 땜에 망했다 라고 보기 어렵다고 봅니다.

부동산은 과장해서 말하면 전국민이 투기꾼인데 그걸 법으로 막을수 있다고 생각한 정책의 실패죠.
검찰개혁은 제가 생각해도 멍청하기 그지 없다는 생각만 계속 들어요. 지들이 일본 자민당처럼 영속집권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말이죠. 180석 얻고 자만감에 취해 집단사고의 틀에 갇혀버린게 아닌가 싶어요.

오히려 전 더 걱정해야할건 LH사태라 봐요.

기본적인 신뢰관계를 무너뜨려 가장 중요한 무형자산을 상실하게 한 점.
실명으로 저지를 정도로 위법이나 부정에 대해 생각이 없고 아예 이게 정상적인 재테크라고 인식하는 점.
부동산 폭등으로 국민이 투기건 투자건 얻는 이익을 죄악시하면서 아예 견제받지 않는 집단이 있다는 점.
사후 처리를 위한 행동도 LH뒤엔 거대한 누군가가 있을거라 의심하게 하는 점.
아울러 검찰개혁과 맞물려 수사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할 거라는 우려가 공중에 널리 퍼진 점.

공자가 국가의 요체라 한 병(兵), 식(食), 신(信) 중에서 운동권 비판이야 병의 문제 중 최말단이지만, LH는 가장 큰 근본인 신을 아예 뭉개버리는 지경이 되었으니까요.
21/03/09 23:00
답이머얌 님// 제가 볼때는 전형적인 한국형 좌파식 사고방식에서 나온 대표적인 문제가 부동산 정책입니다.
박원순, 선대인 등으로 대표되는 특수한 경제관이 있죠. 한국의 범 민주진보진영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구요.

참여연대나 환경운동연합 등 90년대 시민사회단체들이 가진 중도좌파적 관점 + NL의 개발 혐오와 전통적 공동체 지향이 섞여서 2000년대 들어 결합이 완성되며 하나의 조류가 된 것 같구요. 그 관점을 가진 자들이 권력을 가지게 되어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정책화된게 2010년대 후반의 일인것 같네요.
그게 너무 지나친 나머지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에까지, 즉 체제 자체에 엄청나게 흠집을 내고 있는게 지금의 형국인것 같습니다.
정상적인 선진국들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정책들이 너무 남발된걸로 보입니다. 그게 경제적 부작용만 남는걸로 끝나면 다행인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것 같습니다.

LH사태는 그냥 공무원들의 도덕적 해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것 같네요. 그거야 그냥 못하게 하면 그만이죠.
아주 거대한 누군가가 크게 해먹었고 공무원은 그걸 가리는 도구이자 빙산의 일각이다? 그런건 전혀 아닌것 같습니다.
공무원말고도 이번에 걸린 시의원 등 좀 더 있기야 하겠죠. 그래봐야 소소한 정도일 것이고, 거대한 누군가같은건 없을걸요.
제가 볼때는 이거 사건화한건 권력투쟁인것 같아요. 여권 내의 정파들이 정쟁의 도구로 활용하는걸로 보이네요. LH쪽에서 가지고 있던 이권을 빼았아 자기가 가지겠다는 것이 정쟁의 가장 큰 목적일테구요.
이런 험악한 정쟁이야 원래 하는거고, 정쟁 그 자체로 항상 나쁜것은 아닙니다. 음흉한 목적을 가진 정쟁이라 하더라도 어쨌든 뭔가가 이렇게 터져나온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최소한 지금 터져나온것과 같은 일이 다음에는 덜 생길테니까요.
llllllllllllllll
21/03/10 00:52
문화에 운동권 기여도가 거의 없을리가요. 그랬으면 이명박, 박근혜 시절 문화계 블랙리스트 같은 걸 만들었을 이유가 없죠. 문화계야말로 운동권 출신들 판인데...
벙커속에 다크
21/03/11 00:29
명과 암이 있는데,
과거의 정권에 대해선 명을 명이요, 암은 암이요라고 얘길 할 수 있는데.
이 정권은 명도 명이고, 암도 명이라고 우기고 있죠. 그 지지자들도 똑같은 모양이고.
리켈메
21/03/09 22:59
답이머얌 님// 이 정도 인식을 가지고 계시니 문재인을 도쿠가와 이에야스라고 비교하시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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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전개과정

 

(180220 디시위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을 맞고 죽었다. 


1979년 10월 27일 국무총리였던 최규하는 대통령 암살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만일의 변고를 대비하기 위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 


1972년 유신헌법이 제정된 이후 지속되었던 장기집권의 끝으로 정부에 끊임없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항하던 야권은 요동쳤다. 




김대중과 김영삼 등 야권 인사들은 최규하, 신현확을 비롯한 인사들에게 내각의 총사퇴를 요구했다. '현 정부는 박정희의 꼭두각시인 유신잔당이며 그 우두머리가 죽었으니 사퇴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18년간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나라를 다시 일어설 수 있게끔 하고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우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리더가 급작스레 역사속의 뒤안길로 사라지자한국 사회는 큰 변혁을 겪게 된다. 


<박정희 사망 당시의 사회상> 


1978년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호메이니를 주축으로 하는 혁명이 발생한다. 호메이니는 정권을 획득하였으나 혁명 직후의 이란 사회는 혼란 그 자체였다. 


친미 정권인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반미로 돌아서자 미국과의 관계는 냉각되었고 그는 이란 사회의 혼란을 이유 삼아 팔레비 정권 당시 하루 6백만 배럴씩 생산하던 석유의 양을 하루 아침에 2백만 배럴로 줄여버림과 동시에 석유의 수출을 금지한다. 




유신헌법 제정 후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초기 집권 당시 시행하였던 이른바 '수출 주도형 경제 체제'에서 '중화학 공업 체제'로 경제 체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었다. 

1차 석유 위기 당시에는 위기에 굴복하지 않고 국내 기업들이 중동으로 진출하여 이 위기를 극복하였으나 다시 찾아온 석유 위기는 한국 사회와 경제에 크나큰 타격을 입히게 된다. 


또한, 한국의 가발수출업체였던 YH무역이 폐업을 선언하며 YH무역에서 근로하던 여공들이 폐업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이게 되는데 
당시 야당인 신민당 대표이자 박정희에게 대항하던 유력한 야권 정치인 김영삼이


YH무역 여공들에게 시위를 할 수 있게끔 신민당 당사에 자리를 마련해준다. 




그러나 여공들의 시위는 경찰들에 의해 진압되는데, 불행히도 여공 중 한 명인 김경숙이 진압과정에서 신민당사에서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1979년 9월 16일 

YH무역 사건 이후 김영삼은 미국의 뉴욕타임스에 인터뷰를 받게 되는데 이 인터뷰에서 김영삼은 미국이 독재정권(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끝내야하며 카터 행정부가 박정희 정권에 직접적인 압력을 행사해야한다고 주장했다. 

1979년 10월 4일 

위의 인터뷰 사건을 계기로 하여 김영삼은 국회에서 제명되었으며 가택연금 조치에 취해지게 된다. 그를 제명하기 위한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의 징계동의안에 내용을 옮기면 아래와 같다. 

국회의원 김영삼은 국회법 제26조에 의한 국회의원으로서의 신분을 일탈하여 
국헌을 위배하고 국가안위와 국리민복(國利民福)을 현저히 저해하는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등
반국가적 언동을 함으로써 스스로 주권을 모독하여 국회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국회의원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으므로 국회법 제157조에 의해 징계를 요구한다 




김영삼의 국회 제명 소식이 알려지자 부산과 마산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게 되고 부산과 마산에서의 시위가 진행되는 도중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사망하게 된다. 


<최규하의 등장> 


박정희 대통령 서거 당시 국무총리는 최규하였다. 그는 독립 이후 미 군정에서 공무를 보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 정부에서 줄곧 근무하였던 착실한 공무원이었다. 




김종필은 5.16군사정변 이전부터 박정희와 인연을 맺고 있었으며 5.16군사정변에 참여함은 물론이거니와 공화당의 창당을 주도하였고 박정희 정부 초기, 요직인 중앙정보부장을 맡는 등 정권의 2인자로 군림해왔다. 




김종필은 박정희가 대통령 임기를 끝마친 후 다음 대통령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가 삼선개헌은 물론, 유신헌법을 통해 장기 집권의 틀을 만들어내자 반발했다. 


1971년 6월 4일 

박정희는 유신헌법 제정 이후 대통령에 선출되자 김종필을 국무총리에 발탁했다. 김종필은 절대 권력의 대통령 휘하의 국무총리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으며 이는 끊임없이 그가 박정희와 반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박정희는 1975년 12월 18일 부로 김종필을 국무총리직에서 경질한다. 

1975년 12월 18일 

박정희는 김종필의 후임으로 유능한 외교관이었던 최규하를 국무총리에 임명한다. 최규하는 김종필과 같은 '정치인'이 아닌 '외교관'이었다. 

김종필과의 갈등으로 박정희는 자신을 견제하는 국무총리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YWCA위장결혼식 사건과 최규하의 대통령 취임> 

이제 다시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의 내용을 전개해보자. 
박정희 대통령 운구차.png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1979년 11월 10일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는 아래와 같은 내용의 담화를 발표한다.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세계적 경제불황과 석유를 포함한 자원문제는 
우리 국내경제에도 무거운 짐이 되고 있습니다.


…본인은 대통령권한대행으로서 헌법에 규정된 시일내에 국법이 정하는 절차에 따라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여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정부를 이양한다는 것을 정부방침으로 하였으며 

그리고 이 기회를 빌어 헌법문제에 관한 한 본인의 의견을 개진한다면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현행헌법에 규정된 잔여임기를 채우지 않고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빠른 기간내에 각계각층의 의견을 광범하게 들어서 헌법을 개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안정을 바라라는 국민의 염원에 부응하면서 헌정질서를 유지하는 이 나라 민주주의를 착실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슬기로운 길이며 또한 순리라고 믿습니다. 

이 말을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1. 조속한 시일 내에 유신헌법에 의거하여 대통령 선거를 치루겠다. 2. 새로 선출된 대통령은 헌법을 개정하는 것을 정부 방침으로 한다. 3. 최대한 빨리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민주주의를 가져오게 하겠다. 


김대중과 김영삼을 비롯한 야권 인사들은 최규하의 담화에 반발했다. 이들이 최규하의 민주화 약속 담화에도 불구하고 반발한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유신헌법에 의거하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에 반대한다. 2. 유신잔당이 헌법 개정을 하겠다는 것인가? 즉각 사퇴하라. 


1979년 11월 24일 

야권의 이같은 요구에 정부가 대응하지 않자 야권이 먼저 움직인다. 전 대통령 윤보선을 주축으로 하여 재야 인사 400여 명이 서울 YWCA회관에서 위장 결혼식 사건을 계획하고 이곳에 참석하였다. 

그 후 그들은 결혼식을 올리는 척 하면서 일제히 정부를 규탄하고 유신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 등을 반대하는 시위를 개최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재야 인사들을 미행하던 경찰들에 의해 금세 진압되었다. 


1979년 12월 6일 

최규하가 담화에서 밝혔듯이 대통령 선거가 시행되었고 최규하가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대통령에 피선되자 하루 뒤인 1979년 12월 7일, 1975년 2월 13일 부로 대한민국에 적용되고 있던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의결한다. 

긴급조치 9호에는 개헌 논의에 대한 언급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최규하가 이 조치를 해제하여 개헌에 대한 논의가 합법이 되었으며 활발하게 진행되게 된다. 


<하나회 세력의 군권 장악>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주축으로 하는 하나회 세력에 의해 12.12사태가 발생한다. 이로 인해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가 연행되고 




국방부장관이었던 노재현이 물러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노태우, 정호용, 백운택, 조홍 등 12.12사태에 참여한 하나회 인사들은 하루 뒤인 12월 13일, 일제히 직책이 변경되어 요직을 맡게 된다. 




김재규가 맡고 있던 중앙정보부장직 서리를 하던 이희성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고 




노재현이 물러난 국방부장관 직은 前 공군참모총장인 주영복이 맡았다. 

이 두 사람은 군권의 책임자로 광주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된 5.17비상계엄확대조치에 관여하여 훗날 광주 민주화 운동 청문회 등에 출석하여 당시 상황에 대해 증언하게 된다. 

※12.12사태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이 글에 담으면 내용이 너무 장대하게 되어 요약함 


<서울의 봄>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됨과 동시에 김대중과 김영삼에게 적용되던 가택연금 조치도 해제된다. 즉, 야권의 유력 정치인들에 의한 정치 활동이 해제된 것으로 야권 지지자들은 환호했다. 


1979년 12월 21일 

최규하가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는 취임사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여 개헌 의지를 내보인다. 

국가의 최고기본법을 제정함에 있어서 본인은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기 떄문에, 
이미 천명한 바와 같이 정부로서도 앞으로 전국의 각계각층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들어가면서


적절한 시기에 구체적인 연구와 검토를 시작할 것입니다. 


1980년 2월 29일 

최규하는 사회안정의 바탕 위에서 착실한 정치발전을 추진한다는 이유를 들어 전 대통령 윤보선, 김대중 등 긴급조치위반자 687명에 대한 사면 조치를 시행했다. 




김영삼은 김대중에게 자신이 당권을 잡고 있던 신민당에 입당하라고 하였으나 김대중은 차기 대통령 선거를 의식하여 김영삼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결국 야권은 김대중을 주축으로 하는 동교동계, 재야 인사들과 
김영삼을 주축으로 하는 신민당계로 분열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국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쪽으로 흘러가게 된다. 





<학생들의 시국성토와 노사분규> 








1980년 4월 





 박정희 정권이 붕괴하고 학생회가 부활된 각 대학에서는 4월에 들어서자 

이른바 '학원민주화투쟁'이 전개되었다. 













이때 주된 이슈는 병영집체훈련 거부 문제였는데, 

당시는 대학교 2학년까지 군사교육(교련)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 주제를 가지고 일부 학생들이 대학교의 학장실 점거, 기물 파괴, 화형식, 교수 폭행 등 

처음 시위가 발생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리 과격화 조짐을 보이는 등 문제가 발생하였다. 





1980년 4월 14일 





 최규하는 특별담화를 통하여 학원 소란 사태와 사회 일부의 국민 단합 저해 언동에 우려를 표하였고 

모두가 협력하여 국가적 시련을 극복하자고 호소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에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을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했다. 

이는 12.12사태 이후 군을 장악한 전두환에게 정부 내 요직에 겸직시킨 것이었다. 













1980년 5월 1일 





 서울대 총학생회는 애초에 병영집체훈련의 거부로 발생한 시위를 철회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의 정치 개입이 민주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아래와 같은 조건을 걸며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한다.






1. 계엄령 즉각 해제할 것 


2. 유신잔당은 즉각 퇴진할 것 


3. 전두환, 신현확 사퇴할 것 


4. 정부 주도 개헌중단할 것 


5. 노동3권 보장할 것 





1980년 5월 7일 





 김대중을 주축으로 하는 국민연합 또한 정부에 아래와 같은 사항을 요구한다. 





1. 계엄령 해제할 것 

2. 정부주도 개헌 포기할 것 

3. 전두환, 신현확 퇴진할 것 





 이와 동시에 그는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유신잔당의 음모를 단호히 분쇄하는 민주화운동을 과감히 전개할 것" 








1980년 4월 21일 





 노동계 또한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일제히 일어났다. 

강원도 사북읍의 탄광 근로자 3500여 명이 사북 경찰서, 사북역 등을 점거한 

사북사태가 발생하였고 이 사건 이후로 전국에 90여 건의 노사분규가 발생하였다. 





결국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대학가의 시위가 확산되어 

학생들이 경찰과 충돌하는 일까지 발생하였고, 


노동계의 시위 또한 끊임없이 발생하여 한국 사회는 혼란으로 빠져 들었다. 








<서울역 회군> 







1980년 5월 9일 





 김대중이 이틀 전 민주화 투쟁을 전개해나갔다는 선언을 하자 김영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김영삼 또한 계엄령의 해제, 정부의 개헌 작업 중지를 요구하였다. 











이에 김종필을 주축으로 하는 공화당은 김영삼의 요구에 반응하였고 

계엄 해제 문제를 거론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1980년 5월 10일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 최규하는 7박 8일 일정으로 중동 순방을 위해 출국한다. 

석유파동의 여파로 경제 위기가 찾아오자 이를 타개할 방법을 찾기 위해 중동으로 간 것이었다. 





최규하는 출국할 때에도 공공질서의 유지와 사회 안정을 위해 국민들이 노력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시위 양상은 더욱 과격해지는 움직임을 보였다. 










1980년 5월 14일 





 서울 지역 27개 대학의 7만여 명이 서울 중심가를 메우며 야간까지 가두 시위를 벌였다. 











날이 갈수록 학생운동이 더욱 심해지자 내무부장관 김종환은 국무총리 신현확에게 말했다. 





경찰력만으로는 학생시위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군의 투입이 필요합니다. 





그만큼 학생 시위는 격렬하였으며 경찰력은 이를 통제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대학생 10만여 명이 모여 시위를 개최한다. 

같은 날,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등 지방의 24개 대학 대학생들도 가두시위를 감행했다. 










이 날의 시위 중 경찰 가스차 3대가 불에 탔으며 

버스 1대가 시위진압 경찰 배치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한다. 











유래없는 유혈 사태에 신현확 국무총리는 특별담화를 발표한다. 





1. 늦어도 연말까지 개헌안을 확정하겠다. 

2. 정부는 정권 이양 약속을 지켜가고 있다. 


3. 사회가 안정되면 계엄령 해제할 것이다. 





이와 함께 학생들은 정부의 약속을 믿고 자숙,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와 같은 정부의 발표에 학생 시위대 대표들은 의견이 엇갈렸다. 

서울대 학생회 회장 심재철은 신현확의 말을 믿고 해산할 것을 주장하였고 

같은 학교 학생회 대의원회 의장 유시민은 정부의 발표를 믿을 수 없으니 계속 시위를 하자고 하였다. 





심재철은 시위를 계속하게 된다면 결국 정부는 군을 투입시킬 것이며 

이는 전두환을 필두로 하는 신군부에게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반대측을 설득하였고 

결국 심재철의 주장이 채택되어 학생 시위는 해산되어 정부는 한 숨을 돌리게 된다. 





이 사건은 훗날 '서울역 회군'으로 불리게 된다. 








<5.17비상계엄확대조치> 










1980년 5월 16일 





 김대중과 김영삼은 아래의 사항을 정부에 요구한다. 





1. 비상계엄 즉시 해제할 것 


2. 정부주도 개헌 작업 포기할 것 













더 나아가 김대중은 자신이 5월 7일 발표한 선언문에 정부가 답변하지 않을 시, 


5월 22일 전국적으로 민주화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민주화 투쟁을 전개해나가겠다고 발표했다. 










최규하는 한국의 급박한 정치 상황과 혼란을 타개하기 위하여 

같은 날인 5월 16일, 중동 순방의 일정을 하루 앞당겨 귀국한다. 







최규하는 귀국 직후 곧바로 청와대에서 


 국무총리 신현확, 내무부장관 김종환, 국방부장관 주영복, 계엄사령관 이희성, 전두환 등에게 

자신이 중동 순방 중일 때 일어난 한국에서의 상황을 보고 받았다. 











이 자리에서 국방부장관 주영복은 북괴 침공설 관련 첩보를 입수하였다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였으며, 다음날 전군 지휘관 회의를 개최하여 

대책을 논의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다음 날 개최된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에는 비상계엄령을 해제시키지 않고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시키는 것이 현 상황을 수습하는 길이라는 의견이 나왔고 

그 자리에 참석해있던 하나회 소속 노태우, 박희도 등이 이에 동조하는 발언을 했다. 





전두환,이희성,주영복 이 세 사람은 전군 지휘관 회의가 끝난 후 최규하 대통령에게 찾아가서 


 위 회의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보고하였다. 





전두환은 여기서 추가적으로 최규하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과 '국회를 대신할 비상기구의 설치'를 요청하지만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의 요구는 거절하고 비상계엄령 확대에 동의하게 된다. 



















결국 야권과 학생들이 요구하던 계엄령 해제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10.26사태 이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선포된 계엄령은 

오히려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에 적용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김대중은 여태까지 진행되었던 학생 시위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5.17비상계엄확대조치 선포 직후 체포되어 보안사령부로 연행되었으며 













공화당 총재인 김종필 또한, 박정희 정권 당시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를 적용받아 

5.17비상계엄확대조치 선포 직후 체포되어 보안사령부로 연행되었다. 














신민당 총재인 김영삼은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자 연행자를 즉시 석방하고 

계엄군을 철수 등을 요구하였으나 5월 20일부로 가택연금 조치에 처해지게 된다. 









1980년 5월 18일






 정부의 계엄령 확대조치에 반발한 광주 시내에서 시위가 발생하게 되고 
이것은 곧 우리가 알고 있는 5.18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5.17비상계엄확대조치> 


1980년 5월 17일 

5.17비상계엄확대조치로 야권 및 재야세력이 주장하던 계엄령 해제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10.26사태 이후 제주도에 적용되지 아니하던 계엄령이 제주도까지 확산되기에 이른다. 

김대중 젊었을 때.png 김종필 젊었을 때.png 

학생들을 조종하여 사회의 혼란을 야기하였다는 이유로 김대중을 비롯한 야권 인사들이 체포되어 연행됨과 함께 김종필을 비롯한 박정희 정권 인사들 또한 부정 축재 혐의로 체포되어 연행된다. 




계엄령에 의해 전국 각지 대학교에 계엄군이 진주하였고 전남대학교의 계엄군은 학교에 남아 시위를 주동하던 8명을 체포한다. 


<5월 18일 - 최초 사망자의 발생과 유언비어> 





계엄령 확대 조치와 함께 전국 주요 대학교에 진주한 계엄군은 


 학생들에 의한 소요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들의 등교를 제지했다. 





그런데, 전남대 앞에서는 등교를 요구하는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계엄군은 이를 제지하며 등교를 할 수 없으니 돌아가라고 발표한다. 










이에 학생들은 계엄군을 향해 돌을 던지며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고 

학생들의 투석 공격으로 분노한 공수부대원들은 진압봉을 들고 고함을 지르며 

돌진 공격을 감행하여 학생들을 진압하기에 이른다. 





전남대에서의 충돌로 공수부대원 7명과 학생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전남대 등교를 거부당한 학생들은 계엄군을 피해 금남로로 일제히 모여들었고 

여기서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를 구호로 외치며 시위를 벌이게 된다. 





경찰은 이들을 해산하는데 실패하였고,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경찰 병력이 시위 진압을 실패했으니 군 병력을 투입시켜달라"고 요청한다. 










공수부대는 시위대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진압봉을 이용하여 시위대를 가격하고 구타를 하였는데 

이를 지켜보던 광주시민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지시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시위가 없는데 광주에서만 시위가 발생했으니 서둘러 진압할 것" 





이때 광주에는 2개 대대의 600여 명의 병력이 계엄군으로 파견되어 있었는데, 

이희성은 사태의 조기 진압을 위하여 광주로 1개 공수 여단의 증파할 것을 결정한다. 








이 날, 광주시민 김경철(28세)이 사망하였다. 

그는 광주 민주화 운동 최초 사망자이며 원인은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이었다. 





같은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유방을 칼로 도려내어 죽였다. 

2. 임산부를 대검으로 찔러 태아를 꺼내서 길바닥에 버렸다. 

3.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러 왔다. 






 <5월 19일 - 최초 사격과 과격해지는 시위 양상>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지시했다. 





호남지역은 일반적으로 김대중을 우상시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계엄군은 시민을 자극하지 않도록 특별히 유념하고 


 광주 소요사태는 배후 조종세력이 지역 감정을 자극, 유발시키는 유언비어를 
날조 및 유포하고 있으니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할 것











공수부대의 강경 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은 시위대에 하나 둘씩 참여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공수부대에게 화염병과 돌을 투척하며 대항했고 

공수부대는 시위대를 검거하고 진압봉으로 가격, 군화로 차는 등 

시위와 진압 강도가 5월 18일보다 한층 더 과격해지고 있었다. 








장형태 전남도지사를 비롯한 기관단체장들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면담을 요청하였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계엄군의 진압 행동이 과격하고 어느 나라 군대인지 모르겠으며 

고교생들 또한 동용하기 시작했으니 연행자를 전원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계엄군이 시위대를 잔혹 진압하지 말 것을 지시하고 

시위의 주동자를 제외한 모든 이는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한편, 일부 시위대는 기름통에 불을 붙여 경찰 저지선으로 굴려 보내 폭발시켰으며 

광주 민주화 운동 발생을 방송하지 않는 MBC 건물에 돌을 던지고 취재 차량 1대를 불태웠다. 








5월 19일에는 최초 사격도 발생했다. 





익명의 제보자가 "사직공원에 공수부대원 시체가 있다"고 계엄분소에 허위 신고를 하였고 

이에 공수부대가 사직공원을 수색하였으나 이는 거짓이었고, 그들은 복귀하기 시작했다. 





그때 시위대가 기습적으로 그들을 공격하였고 불붙은 짚단을 장갑차 안으로 던져 넣으려 했다. 

이에 장갑차 내부에 있던 장교가 M16소총으로 장갑차 뚜껑을 열던 시민에게 공포탄 사격을 했는데 

이때의 사격으로 공포탄에 맞은 김영찬(19세)이 대퇴부에 부상을 입었다. 





같은 날, 광주시민 김안부(36세)가 전두부 열상 등으로 사망했다. 


<5월 20일 - MBC 방송국 방화와 경찰관 사망 사건> 







5월 20일이 되자 아래의 유언비어가 적힌 유인물이 나돌았다. 







1. 죽은 인원이 수십명이다 

2. 공산당도 이렇게 무자비하지 않았다 

3. 계엄군이 경상도 출신이다 








 시위대는 MBC 방송사에 광주에서의 사태를 방송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이날 뉴스에서도 역시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기사가 방영되지 않자 

분노하여 방송국에 화염병을 투척하여 방송사가 화염에 휩싸였다. 








한편, 노동청 앞에서는 시위대와 경찰들이 대치하고 있었는데 

고속버스 1대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파할 목적으로 돌진하여 

경찰관 4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버스를 몰았던 김갑진, 배용주는 


 군중들이 버스를 탈취, 몰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여 버스를 몰았는데 

운전 도중 연기 등으로 앞이 보이지 않아 버스를 멈췄더니 사고가 났다고 진술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광주 소요 사태가 격화되자 20사단의 증파를 결정했다. 





<5월 21일 - 계엄군의 실탄 사격과 시위대의 광주 장악> 










20사단의 광주 증파가 결정되자 20사단은 부대이동을 하여 광주에 도착하였는데 

사단 지휘차량 인솔대가 광주공단 입구에서 시위대의 화염병 공격을 받게 된다. 

여기서 그들은 시위대에게 사단장 지프차 등 지휘차량 14대를 탈취당한다. 










그동안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함구하던 정부는 이 날 최초로 광주 민주화 운동 발생에 대해 발표한다. 




지난 18일 오후부터 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았다 


20일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각종 유언비어가 유포되어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가세함으로써 사태가 악화되었다 21일 오전 7시 현재 군경 5명과 민간인 1명이 사망하였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평온을 회복하도록 모든 대책을 강구하겠다 








 또한, 사태의 조기 진압에 실패한 책임을 들어 


 윤흥정 전교사령관이 해임되고 후임에 소준열 전교사령관이 임명되었다. 










한편, 시위대는 사체 2구가 실린 수레를 앞세우고 
공수부대의 만행을 규탄하며 계엄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사태 해결을 위해 장형태 전라남도 도지사와의 면담을 요구하였는데 

장형태 도지사가 시위대 앞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마이크를 설치하는 도중 

도지사가 광주시장인 구용상에게 "먼저 나가서 시위대를 진정시켜달라"고 하였다. 





시위대는 도지사가 아닌 광주시장이 나타나자 

"도지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며 흥분하여 화염병과 각목을 던졌고 

결국 전남도지사는 시위대 앞에 서 연설을 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대신 장형태 도지사는 헬기를 타고 직접 방송을 하기에 이른다. 

"계엄군이 철수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으니 시민 여러분은 해산하고 생업에 종사해달라" 





이에 시위대는 오전 12시가 될 때까지 계엄군이 광주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계엄군은 철수하지 않았고, 이에 시위대는 계엄군의 저지선을 돌파할 목적으로 

버스를 몰아 계엄군 저지선으로 돌진을 감행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최초 실탄 사격이 발생한다. 

사격 명령자는 없었으며 이들은 시위대의 버스 돌진 공격으로 자위권을 발동한 것이었다. 








이 사격으로 버스 운전사가 사망하였고 시위대는 "계엄군이 총격을 가했다"고 주장하며 

전남 도처에 위치한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 무장하였고 무기 사용 교육을 실시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시민군'이라 불리우는 무장시위대의 출범이었다. 










시민군은 계엄군과 총격전을 시작하였으며 LMG기관총을 이용하여 

전남도청과 해산을 종용하는 군 헬기 등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시위대가 무장을 하고 계엄군과의 총격전까지 벌어지자 

전교사는 계엄군을 전남도청에서 철수시켜 광주 외곽으로 이동시켰으며 

시위대가 전남도청을 장악한다. 





계엄군이 철수하는 도중 시위대가 총격과 차량 돌진 공격을 감행하여 

군 차량 3대가 전복하였고 군인 2명이 사망, 6명이 부상을 당했다. 








국무총리인 신현확은 사태의 책임을 지고 국무총리직에서 사임했다. 





<5월 22일 - 시민수습위원회의 출범과 시민군 내부의 갈등> 








이날, 전남도청에서는 사태의 해결을 위하여 시민수습위원회가 출범하였다. 

그들은 광주 시내에서 철수한 계엄군 본부에 찾아가 사태 해결을 위해 협상을 한다. 





요구사항은 "군의 과잉 진압을 인정하고 사후 보복하지 않으면 무장 해제 하겠다"는 것이었다. 

군은 "모든 문제는 무기를 반납한 후에 논의될 수 있다"고 하였고 연행하였던 848명을 석방했다. 








수습위원회는 협상 결과를 전남도청의 시위대에게 보고하면서 

"무기는 무조건 반납할 수 밖에 없다"고 하자, 시위대는 반발하며 

이들의 협상 결과가 미온적이고 굴욕적이라며 야유를 보내며 무기 반납을 거부했다. 











정부측에서는 사태의 해결을 위해 신현확의 사퇴로 


 국무총리 서리를 하게 된 박충훈이 광주에 방문하여 특별담화를 녹음한 후 상경했다. 








<5월 23일 - 계엄사의 진압 작전 논의와 총기 반납 논쟁>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진압 작전을 논의하면서 북괴 개입설을 제기했다. 

"광주 소요 사태에는 가발 사용자와 복면한 자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북괴의 침투를 의심케 하는 상태" 










시민군은 시위 도중 사망한 시위대 사체 58구를 전남도청에 전시하였고 

시민군 사이에서는 무기 반납 문제를 두고 논쟁이 오고 갔다. 





온건파는 여태껏 회수한 총기 3,000여 정 중 200정을 우선적으로 


 계엄군 본부에 방문하여 반납하였으나 그 후에는 강경파의 제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5월 24일 - 계엄군 간의 오인사격과 간첩 이창용> 








이 날, 광주 외곽에 배치된 계엄군들 간에 오인사격이 다수 발생하였다. 





매복하고 있던 계엄군들이 아군을 시민군으로 오인하여 사격하고, 

공격받은 계엄군은 이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교전이 발생한 것인데 

아군 간의 오인사격으로 인해 군인 12명이 사망하였다. 





오인사격으로 격분한 공수부대는 체포한 시민군 1명과 

시민군으로 오인된 마을 청년 3명, 하수구에 숨어있던 50세 여성에게 

총격을 감행하여 사망하게 하였다. 








한편, 전남도청의 온건파는 계엄군 본부에 방문하여 협상을 벌였고 

계엄군 시내 진입 금지, 과잉 진압 인정, 연행자 석방, 사태 후 처벌 금지 등을 약속받고 

시민군에게 결과 보고를 하며 무기를 반납하라고 호소하였으나... 








강경파는 온건파의 요구를 묵살하고 오히려 자유성토대회를 열어 

전두환 화형식을 개최하고 가두행진을 하며 무기를 반납하지 않았다. 








한편, 서울에서 북괴 간첩 이창용이 검거되었는데 경찰은 아래와 같이 발표했다. 





간첩 이창용이 남해안에 침투, 광주에 들어가 선동 및 분란 행위를 하려 하였으나 

계엄군의 검문 검색으로 포기하고 특급열차로 서울역에 도착하여 배회하다 검거되었다 





※훗날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이창용이 첩보 행위의 목적으로 침투한 북괴 간첩이 맞지만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선동 행위'라는 침투 목적은 신군부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한다. 








<5월 25일 - 전남도청 독침사건과 최규하 대통령의 광주 방문> 










전남도청의 시민군 중에 장계범과 정향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은 시민군에 의해 북괴 간첩으로 오인받게 되었다. 





이에 장계범은 "독침에 맞았다"고 주장하며 쓰러졌고 

정향규는 장계범을 차량에 태워 전남도청을 빠져 나간다. 





그들은 후일, 유언비어 날조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2년형에 처해진다. 














최규하 대통령은 사태의 수습을 위해 광주로 향했다. 

광주에 도착한 최규하는 "내가 직접 전남도청으로 가 시민들을 만나보겠다"고 하였으나 

소준열 전교사령관을 비롯한 관료들이 이를 극구 만류하여 호소문을 녹음 한 뒤 상경한다. 





다 같은 국민 사이에 대화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으며 

최대한 관용을 베풀고 불문에 부칠 것이니 

냉정과 이성을 되찾아 사태를 수습합시다. 








<5월 26일 - 전남도청 TNT 제거와 온건파의 도주> 








이 날, 전교사 교관 4명이 전남도청에 잠입하여 TNT와 수류탄 496발의 뇌관을 제거했다. 

사진에 나와있는 배승일 씨는 이 날의 공로로 훈장을 받게 되지만 훗날 박탈당했다. 

그러나 소송을 통해 훈장을 되찾아 명예를 회복했다. 










전남도청에서는 온건파가 아래와 같이 주장하며 무기를 반납하자고 주장했다. "진압작전시 대항하는 것은 엄청난 피해만을 야기할 뿐이므로 무기를 반납하고 의연히 처벌받자" 





그러나 강경파인 윤상원과 박남선 등이 최후 항전을 주장하였고 

무기 반납을 주장하는 온건파를 총으로 위협하였으며 온건파는 전남도청에서 빠져나와 도주한다. 











시민군은 계엄군의 공격이 임박한 것을 알고 각지에 배치되었고 

전남도청의 민주시민투쟁위원회 홍보부 소속 박영순, 이경희가 


 광주시내를 돌며 시민군에게 전남도청으로 와 시민군에 합류하는 방송을 하였다. 








<5월 27일 -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압> 










계엄군은 새벽에 전남도청을 기습 공격하여 저항하는 시민군과의 교전을 벌였으나 

쏜살같이 진압에 완료하고 전남도청을 점령함으로써 광주에서의 작전을 종료한다. 





이 날, 진압작전으로 인해 시위대 17명이 사망하였고 

시위대 295명이 체포되었으며 계엄군 3명이 사망하였다. 








<그 후> 







광주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군인 23명, 경찰 4명, 민간인 166명 등 모두 193명이 사망했다. 













훗날 최규하가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전두환이 대통령에 선출되는데 














 레이건의 당선으로 공산주의의 소멸을 주장하고 있던 미국은 

한국에서의 혼란을 원치 않았기에 전두환 정부를 인정하고 협력관계를 결성한다. 














5.17비상계엄확대조치로 인해 체포되어 연행된 김대중은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배후 조종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요청으로 형 집행 정지 처분을 받았으며 


1982년 12월, 석방 후 미국으로 망명한다. 
















박정희 정권의 2인자이자 박정희 사후 유력한 대선 후보였던 김종필은 

부정 축재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6월민주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이 될 때까지 그는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다. 













김영삼은 신군부에 의해 정계 은퇴 선언을 강요받아 은퇴 선언을 하였으나 

김대중이 체포되었다가 미국으로 망명하고, 정부의 일부 인사의 정치 활동 금지가 일부 완화되자 

정계에 복귀하여 6월민주항쟁 발생 이전까지 야당 활동을 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1985년 5월 23일, 서울에 위치한 미국 문화원을 기습으로 점거하여 

"광주 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사과하라"며 농성을 벌였다가 26일 자진해산,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들은 "5.18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을 미국이 인정한 것"을 이유로 들어 시위를 벌인 것이었다. 

이 날의 농성 사건에는 현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정청래도 참여했었다. 










한국의 민주화를 주장하며 미국을 동반자로 생각했던 일부 학생들은 

미국이 전두환 정부를 인정하자 반미(反美)성향을 띠게 되었고 

한국의 민주화에 필요한 동반자를 '북한'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NL이라고 분류되는 주체사상파가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6월민주항쟁의 결과로 직선제가 부활하고 

노태우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곧 치루어진 총선에서 패배하여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고, 결국 노태우는 야권의 압력에 굴복하여 5공청문회를 개최하게 되는데 

전두환이 국회에 출석하였다가 초선 의원이었던 노무현이 명패를 던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노태우 대통령을 거쳐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군부 인사들의 정치가 끝나고 민주화 인사가 정권을 잡게 된다. 














이에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에 체포되었던 정동년은 

전두환, 노태우 등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을 검찰에 고소하였는데 

검찰은 12.12사태와 5.18광주 민주화 운동, 5공화국 인사들을 소환하여 조사한 결과 

전두환, 노태우 등에게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려 처벌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의 바탕이 되는 수사보고서는 이 때 작서되었으며 

계엄군의 최초 실탄 발포 당시 사격 명령자는 없었던 것으로 발표되었고 



광주 민주화 운동 초기 유포된 유언비어의 출처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검찰의 발표에 여론은 들끓어 올랐고 

때마침 발생한 노태우의 비자금 사건이 화제가 되자 

그 사건에 연루되어있던 김영삼은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 수감하여 처벌하기에 이른다. 





전두환은 사형선고를 받고 노태우는 징역 17년에 처해졌으나 











 제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당선되자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이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특별사면을 시행하여 두 사람은 석방되었다. 










최규하는 훗날 정부기관에서 12.12사태와 5.18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조사를 할 때 

증인으로 출석받을 것을 요구받았으나 조사가 끝날 때까지 끝내 출석하지 않았으며 

그는 사망할 때까지 위 사건들에 대한 증언을 하지 않았다.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주영복 국방부장관은 5.18 재판 당시 


5.17비상계엄확대조치에 깊게 관여한 것이 인정되어 


 징역 7년형에 처해졌으나 역시 사면됐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의 31사단장이었던 정웅은 


"광주 민주화 운동의 무력진압을 막으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고 주장하였으며 김대중의 평민당 소속 국회의원을 지냈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사망한 시민들은 광주 망월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며 








 계엄군 및 경찰들은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 28묘역에 안장되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계엄군과 경찰, 시민들 모두에게 가슴 아픈 상처를 남겼다. 





다시는 이러한 불미스러운 역사가 되풀이되지를 않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참고한 자료> 





1. 1997년 서울지방검찰청, 군 검찰부 5.18 수사보고서 

2.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5.18 수사보고서 





 이 글은 수사보고서의 원문을 근거로 하였으나 가독성을 위하여 

계엄군의 배치도와 각 날짜마다의 사망자 명단을 요약하였음 


"정치성향을 배제해 최대한 중립적으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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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1 디시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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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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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을 맞고 죽었다.


1979년 10월 27일 국무총리였던 최규하는 대통령 암살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만일의 변고를 대비하기 위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


1972년 유신헌법이 제정된 이후 지속되었던 장기집권의 끝으로 정부에 끊임없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항하던 야권은 요동쳤다.

 

김대중과 김영삼 등 야권 인사들은 최규하, 신현확을 비롯한 인사들에게 내각의 총사퇴를 요구했다. '현 정부는 박정희의 꼭두각시인 유신잔당이며 그 우두머리가 죽었으니 사퇴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18년간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나라를 다시 일어설 수 있게끔 하고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우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리더가 급작스레 역사속의 뒤안길로 사라지자한국 사회는 큰 변혁을 겪게 된다.


박정희 사망 당시의 사회상

1978년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호메이니를 주축으로 하는 혁명이 발생한다. 호메이니는 정권을 획득하였으나 혁명 직후의 이란 사회는 혼란 그 자체였다.


친미 정권인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반미로 돌아서자 미국과의 관계는 냉각되었고 그는 이란 사회의 혼란을 이유 삼아 팔레비 정권 당시 하루 6백만 배럴씩 생산하던 석유의 양을 하루 아침에 2백만 배럴로 줄여버림과 동시에 석유의 수출을 금지한다.

 

유신헌법 제정 후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초기 집권 당시 시행하였던 이른바 '수출 주도형 경제 체제'에서 '중화학 공업 체제'로 경제 체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었다.

1차 석유 위기 당시에는 위기에 굴복하지 않고 국내 기업들이 중동으로 진출하여 이 위기를 극복하였으나 다시 찾아온 석유 위기는 한국 사회와 경제에 크나큰 타격을 입히게 된다.


또한, 한국의 가발수출업체였던 YH무역이 폐업을 선언하며 YH무역에서 근로하던 여공들이 폐업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이게 되는데

당시 야당인 신민당 대표이자 박정희에게 대항하던 유력한 야권 정치인 김영삼이

YH무역 여공들에게 시위를 할 수 있게끔 신민당 당사에 자리를 마련해준다.

 

그러나 여공들의 시위는 경찰들에 의해 진압되는데, 불행히도 여공 중 한 명인 김경숙이 진압과정에서 신민당사에서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1979년 9월 16일

YH무역 사건 이후 김영삼은 미국의 뉴욕타임스에 인터뷰를 받게 되는데 이 인터뷰에서 김영삼은 미국이 독재정권(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끝내야하며 카터 행정부가 박정희 정권에 직접적인 압력을 행사해야한다고 주장했다.

1979년 10월 4일

위의 인터뷰 사건을 계기로 하여 김영삼은 국회에서 제명되었으며 가택연금 조치에 취해지게 된다. 그를 제명하기 위한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의 징계동의안에 내용을 옮기면 아래와 같다.

국회의원 김영삼은 국회법 제26조에 의한 국회의원으로서의 신분을 일탈하여

국헌을 위배하고 국가안위와 국리민복(國利民福)을 현저히 저해하는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등
반국가적 언동을 함으로써 스스로 주권을 모독하여 국회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국회의원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으므로 국회법 제157조에 의해 징계를 요구한다

 

김영삼의 국회 제명 소식이 알려지자 부산과 마산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게 되고 부산과 마산에서의 시위가 진행되는 도중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사망하게 된다.


최규하의 등장

박정희 대통령 서거 당시 국무총리는 최규하였다. 그는 독립 이후 미 군정에서 공무를 보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 정부에서 줄곧 근무하였던 착실한 공무원이었다.

 

김종필은 5.16군사정변 이전부터 박정희와 인연을 맺고 있었으며 5.16군사정변에 참여함은 물론이거니와 공화당의 창당을 주도하였고 박정희 정부 초기, 요직인 중앙정보부장을 맡는 등 정권의 2인자로 군림해왔다.

 

김종필은 박정희가 대통령 임기를 끝마친 후 다음 대통령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가 삼선개헌은 물론, 유신헌법을 통해 장기 집권의 틀을 만들어내자 반발했다.


1971년 6월 4일

박정희는 유신헌법 제정 이후 대통령에 선출되자 김종필을 국무총리에 발탁했다. 김종필은 절대 권력의 대통령 휘하의 국무총리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으며 이는 끊임없이 그가 박정희와 반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박정희는 1975년 12월 18일 부로 김종필을 국무총리직에서 경질한다.

1975년 12월 18일

박정희는 김종필의 후임으로 유능한 외교관이었던 최규하를 국무총리에 임명한다. 최규하는 김종필과 같은 '정치인'이 아닌 '외교관'이었다.

김종필과의 갈등으로 박정희는 자신을 견제하는 국무총리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YWCA위장결혼식 사건과 최규하의 대통령 취임

이제 다시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의 내용을 전개해보자.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1979년 11월 10일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는 아래와 같은 내용의 담화를 발표한다.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세계적 경제불황과 석유를 포함한 자원문제는

우리 국내경제에도 무거운 짐이 되고 있습니다.

…본인은 대통령권한대행으로서 헌법에 규정된 시일내에 국법이 정하는 절차에 따라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여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정부를 이양한다는 것을 정부방침으로 하였으며

그리고 이 기회를 빌어 헌법문제에 관한 한 본인의 의견을 개진한다면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현행헌법에 규정된 잔여임기를 채우지 않고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빠른 기간내에 각계각층의 의견을 광범하게 들어서 헌법을 개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안정을 바라라는 국민의 염원에 부응하면서 헌정질서를 유지하는 이 나라 민주주의를 착실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슬기로운 길이며 또한 순리라고 믿습니다.

이 말을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1. 조속한 시일 내에 유신헌법에 의거하여 대통령 선거를 치루겠다. 2. 새로 선출된 대통령은 헌법을 개정하는 것을 정부 방침으로 한다. 3. 최대한 빨리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민주주의를 가져오게 하겠다.


김대중과 김영삼을 비롯한 야권 인사들은 최규하의 담화에 반발했다. 이들이 최규하의 민주화 약속 담화에도 불구하고 반발한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유신헌법에 의거하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에 반대한다. 2. 유신잔당이 헌법 개정을 하겠다는 것인가? 즉각 사퇴하라.


1979년 11월 24일

야권의 이같은 요구에 정부가 대응하지 않자 야권이 먼저 움직인다. 전 대통령 윤보선을 주축으로 하여 재야 인사 400여 명이 서울 YWCA회관에서 위장 결혼식 사건을 계획하고 이곳에 참석하였다.

그 후 그들은 결혼식을 올리는 척 하면서 일제히 정부를 규탄하고 유신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 등을 반대하는 시위를 개최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재야 인사들을 미행하던 경찰들에 의해 금세 진압되었다.


1979년 12월 6일

최규하가 담화에서 밝혔듯이 대통령 선거가 시행되었고 최규하가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는 대통령에 피선되자 하루 뒤인 1979년 12월 7일, 1975년 2월 13일 부로 대한민국에 적용되고 있던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의결한다.

긴급조치 9호에는 개헌 논의에 대한 언급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최규하가 이 조치를 해제하여 개헌에 대한 논의가 합법이 되었으며 활발하게 진행되게 된다.


하나회 세력의 군권 장악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주축으로 하는 하나회 세력에 의해 12.12사태가 발생한다. 이로 인해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가 연행되고

 

국방부장관이었던 노재현이 물러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노태우, 정호용, 백운택, 조홍 등 12.12사태에 참여한 하나회 인사들은 하루 뒤인 12월 13일, 일제히 직책이 변경되어 요직을 맡게 된다.

 

김재규가 맡고 있던 중앙정보부장직 서리를 하던 이희성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고

 

노재현이 물러난 국방부장관 직은 前 공군참모총장인 주영복이 맡았다.

이 두 사람은 군권의 책임자로 광주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된 5.17비상계엄확대조치에 관여하여 훗날 광주 민주화 운동 청문회 등에 출석하여 당시 상황에 대해 증언하게 된다.

※12.12사태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이 글에 담으면 내용이 너무 장대하게 되어 요약함


서울의 봄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됨과 동시에 김대중과 김영삼에게 적용되던 가택연금 조치도 해제된다. 즉, 야권의 유력 정치인들에 의한 정치 활동이 해제된 것으로 야권 지지자들은 환호했다.


1979년 12월 21일

최규하가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는 취임사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여 개헌 의지를 내보인다.

국가의 최고기본법을 제정함에 있어서 본인은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기 떄문에,

이미 천명한 바와 같이 정부로서도 앞으로 전국의 각계각층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들어가면서

적절한 시기에 구체적인 연구와 검토를 시작할 것입니다.


1980년 2월 29일

최규하는 사회안정의 바탕 위에서 착실한 정치발전을 추진한다는 이유를 들어 전 대통령 윤보선, 김대중 등 긴급조치위반자 687명에 대한 사면 조치를 시행했다.

 

김영삼은 김대중에게 자신이 당권을 잡고 있던 신민당에 입당하라고 하였으나 김대중은 차기 대통령 선거를 의식하여 김영삼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결국 야권은 김대중을 주축으로 하는 동교동계, 재야 인사들과

김영삼을 주축으로 하는 신민당계로 분열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국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쪽으로 흘러가게 된다.

 


학생들의 시국성토와 노사분규

1980년 4월

 


박정희 정권이 붕괴하고 학생회가 부활된 각 대학에서는 4월에 들어서자

이른바 '학원민주화투쟁'이 전개되었다.

 

 

 

 

이때 주된 이슈는 병영집체훈련 거부 문제였는데,

당시는 대학교 2학년까지 군사교육(교련)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 주제를 가지고 일부 학생들이 대학교의 학장실 점거, 기물 파괴, 화형식, 교수 폭행 등

처음 시위가 발생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리 과격화 조짐을 보이는 등 문제가 발생하였다.

 


1980년 4월 14일

 


최규하는 특별담화를 통하여 학원 소란 사태와 사회 일부의 국민 단합 저해 언동에 우려를 표하였고

모두가 협력하여 국가적 시련을 극복하자고 호소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에 보안사령관인 전두환을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했다.

이는 12.12사태 이후 군을 장악한 전두환에게 정부 내 요직에 겸직시킨 것이었다.

 

 

 

 

1980년 5월 1일

 


서울대 총학생회는 애초에 병영집체훈련의 거부로 발생한 시위를 철회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의 정치 개입이 민주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아래와 같은 조건을 걸며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한다.

 


1. 계엄령 즉각 해제할 것


2. 유신잔당은 즉각 퇴진할 것


3. 전두환, 신현확 사퇴할 것


4. 정부 주도 개헌중단할 것


5. 노동3권 보장할 것

 


1980년 5월 7일

 


김대중을 주축으로 하는 국민연합 또한 정부에 아래와 같은 사항을 요구한다.

 


1. 계엄령 해제할 것

2. 정부주도 개헌 포기할 것

3. 전두환, 신현확 퇴진할 것

 


이와 동시에 그는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유신잔당의 음모를 단호히 분쇄하는 민주화운동을 과감히 전개할 것"

 

 


1980년 4월 21일

 


노동계 또한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일제히 일어났다.

강원도 사북읍의 탄광 근로자 3500여 명이 사북 경찰서, 사북역 등을 점거한

사북사태가 발생하였고 이 사건 이후로 전국에 90여 건의 노사분규가 발생하였다.

 


결국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대학가의 시위가 확산되어

학생들이 경찰과 충돌하는 일까지 발생하였고,


노동계의 시위 또한 끊임없이 발생하여 한국 사회는 혼란으로 빠져 들었다.

 

 


서울역 회군

1980년 5월 9일

 


김대중이 이틀 전 민주화 투쟁을 전개해나갔다는 선언을 하자 김영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김영삼 또한 계엄령의 해제, 정부의 개헌 작업 중지를 요구하였다.

 

 

 


이에 김종필을 주축으로 하는 공화당은 김영삼의 요구에 반응하였고

계엄 해제 문제를 거론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1980년 5월 10일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 최규하는 7박 8일 일정으로 중동 순방을 위해 출국한다.

석유파동의 여파로 경제 위기가 찾아오자 이를 타개할 방법을 찾기 위해 중동으로 간 것이었다.

 


최규하는 출국할 때에도 공공질서의 유지와 사회 안정을 위해 국민들이 노력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시위 양상은 더욱 과격해지는 움직임을 보였다.

 

 

 

1980년 5월 14일

 


서울 지역 27개 대학의 7만여 명이 서울 중심가를 메우며 야간까지 가두 시위를 벌였다.

 

 

 


날이 갈수록 학생운동이 더욱 심해지자 내무부장관 김종환은 국무총리 신현확에게 말했다.

 


경찰력만으로는 학생시위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군의 투입이 필요합니다.

 


그만큼 학생 시위는 격렬하였으며 경찰력은 이를 통제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에 대학생 10만여 명이 모여 시위를 개최한다.

같은 날,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등 지방의 24개 대학 대학생들도 가두시위를 감행했다.

 

 

 

이 날의 시위 중 경찰 가스차 3대가 불에 탔으며

버스 1대가 시위진압 경찰 배치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한다.

 

 

 


유래없는 유혈 사태에 신현확 국무총리는 특별담화를 발표한다.

 


1. 늦어도 연말까지 개헌안을 확정하겠다.

2. 정부는 정권 이양 약속을 지켜가고 있다.


3. 사회가 안정되면 계엄령 해제할 것이다.

 


이와 함께 학생들은 정부의 약속을 믿고 자숙,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와 같은 정부의 발표에 학생 시위대 대표들은 의견이 엇갈렸다.

서울대 학생회 회장 심재철은 신현확의 말을 믿고 해산할 것을 주장하였고

같은 학교 학생회 대의원회 의장 유시민은 정부의 발표를 믿을 수 없으니 계속 시위를 하자고 하였다.

 


심재철은 시위를 계속하게 된다면 결국 정부는 군을 투입시킬 것이며

이는 전두환을 필두로 하는 신군부에게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반대측을 설득하였고

결국 심재철의 주장이 채택되어 학생 시위는 해산되어 정부는 한 숨을 돌리게 된다.

 


이 사건은 훗날 '서울역 회군'으로 불리게 된다.

 

 


5.17비상계엄확대조치

1980년 5월 16일

 


김대중과 김영삼은 아래의 사항을 정부에 요구한다.

 


1. 비상계엄 즉시 해제할 것


2. 정부주도 개헌 작업 포기할 것

 

 

 

 

더 나아가 김대중은 자신이 5월 7일 발표한 선언문에 정부가 답변하지 않을 시,


5월 22일 전국적으로 민주화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민주화 투쟁을 전개해나가겠다고 발표했다.

 

 

 

최규하는 한국의 급박한 정치 상황과 혼란을 타개하기 위하여

같은 날인 5월 16일, 중동 순방의 일정을 하루 앞당겨 귀국한다.

 

 

최규하는 귀국 직후 곧바로 청와대에서


국무총리 신현확, 내무부장관 김종환, 국방부장관 주영복, 계엄사령관 이희성, 전두환 등에게

자신이 중동 순방 중일 때 일어난 한국에서의 상황을 보고 받았다.

 

 

 


이 자리에서 국방부장관 주영복은 북괴 침공설 관련 첩보를 입수하였다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였으며, 다음날 전군 지휘관 회의를 개최하여

대책을 논의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다음 날 개최된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에는 비상계엄령을 해제시키지 않고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시키는 것이 현 상황을 수습하는 길이라는 의견이 나왔고

그 자리에 참석해있던 하나회 소속 노태우, 박희도 등이 이에 동조하는 발언을 했다.

 


전두환,이희성,주영복 이 세 사람은 전군 지휘관 회의가 끝난 후 최규하 대통령에게 찾아가서


위 회의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보고하였다.

 


전두환은 여기서 추가적으로 최규하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과 '국회를 대신할 비상기구의 설치'를 요청하지만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의 요구는 거절하고 비상계엄령 확대에 동의하게 된다.

 

 

 

 

 

 

결국 야권과 학생들이 요구하던 계엄령 해제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10.26사태 이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선포된 계엄령은

오히려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에 적용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김대중은 여태까지 진행되었던 학생 시위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5.17비상계엄확대조치 선포 직후 체포되어 보안사령부로 연행되었으며

 

 

 

 

공화당 총재인 김종필 또한, 박정희 정권 당시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를 적용받아

5.17비상계엄확대조치 선포 직후 체포되어 보안사령부로 연행되었다.

 

 

 

 


신민당 총재인 김영삼은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자 연행자를 즉시 석방하고

계엄군을 철수 등을 요구하였으나 5월 20일부로 가택연금 조치에 처해지게 된다.

 

 

 

1980년 5월 18일

 


정부의 계엄령 확대조치에 반발한 광주 시내에서 시위가 발생하게 되고

이것은 곧 우리가 알고 있는 5.18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5.17비상계엄확대조치

1980년 5월 17일

5.17비상계엄확대조치로 야권 및 재야세력이 주장하던 계엄령 해제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10.26사태 이후 제주도에 적용되지 아니하던 계엄령이 제주도까지 확산되기에 이른다.

김대중 젊었을 때.png 김종필 젊었을 때.png

학생들을 조종하여 사회의 혼란을 야기하였다는 이유로 김대중을 비롯한 야권 인사들이 체포되어 연행됨과 함께 김종필을 비롯한 박정희 정권 인사들 또한 부정 축재 혐의로 체포되어 연행된다.

 

계엄령에 의해 전국 각지 대학교에 계엄군이 진주하였고 전남대학교의 계엄군은 학교에 남아 시위를 주동하던 8명을 체포한다.


5월 18일 - 최초 사망자의 발생과 유언비어

계엄령 확대 조치와 함께 전국 주요 대학교에 진주한 계엄군은


학생들에 의한 소요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들의 등교를 제지했다.

 


그런데, 전남대 앞에서는 등교를 요구하는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계엄군은 이를 제지하며 등교를 할 수 없으니 돌아가라고 발표한다.

 

 

 

이에 학생들은 계엄군을 향해 돌을 던지며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고

학생들의 투석 공격으로 분노한 공수부대원들은 진압봉을 들고 고함을 지르며

돌진 공격을 감행하여 학생들을 진압하기에 이른다.

 


전남대에서의 충돌로 공수부대원 7명과 학생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전남대 등교를 거부당한 학생들은 계엄군을 피해 금남로로 일제히 모여들었고

여기서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를 구호로 외치며 시위를 벌이게 된다.

 


경찰은 이들을 해산하는데 실패하였고,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경찰 병력이 시위 진압을 실패했으니 군 병력을 투입시켜달라"고 요청한다.

 

 

 

공수부대는 시위대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진압봉을 이용하여 시위대를 가격하고 구타를 하였는데

이를 지켜보던 광주시민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지시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시위가 없는데 광주에서만 시위가 발생했으니 서둘러 진압할 것"

 


이때 광주에는 2개 대대의 600여 명의 병력이 계엄군으로 파견되어 있었는데,

이희성은 사태의 조기 진압을 위하여 광주로 1개 공수 여단의 증파할 것을 결정한다.

 

 


이 날, 광주시민 김경철(28세)이 사망하였다.

그는 광주 민주화 운동 최초 사망자이며 원인은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이었다.

 


같은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유방을 칼로 도려내어 죽였다.

2. 임산부를 대검으로 찔러 태아를 꺼내서 길바닥에 버렸다.

3.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러 왔다.

 


 

5월 19일 - 최초 사격과 과격해지는 시위 양상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지시했다.

 


호남지역은 일반적으로 김대중을 우상시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계엄군은 시민을 자극하지 않도록 특별히 유념하고


광주 소요사태는 배후 조종세력이 지역 감정을 자극, 유발시키는 유언비어를 날조 및 유포하고 있으니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할 것

 

 

 

공수부대의 강경 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은 시위대에 하나 둘씩 참여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공수부대에게 화염병과 돌을 투척하며 대항했고

공수부대는 시위대를 검거하고 진압봉으로 가격, 군화로 차는 등

시위와 진압 강도가 5월 18일보다 한층 더 과격해지고 있었다.

 

 


장형태 전남도지사를 비롯한 기관단체장들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면담을 요청하였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계엄군의 진압 행동이 과격하고 어느 나라 군대인지 모르겠으며

고교생들 또한 동용하기 시작했으니 연행자를 전원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계엄군이 시위대를 잔혹 진압하지 말 것을 지시하고

시위의 주동자를 제외한 모든 이는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한편, 일부 시위대는 기름통에 불을 붙여 경찰 저지선으로 굴려 보내 폭발시켰으며

광주 민주화 운동 발생을 방송하지 않는 MBC 건물에 돌을 던지고 취재 차량 1대를 불태웠다.

 

 


5월 19일에는 최초 사격도 발생했다.

 


익명의 제보자가 "사직공원에 공수부대원 시체가 있다"고 계엄분소에 허위 신고를 하였고

이에 공수부대가 사직공원을 수색하였으나 이는 거짓이었고, 그들은 복귀하기 시작했다.

 


그때 시위대가 기습적으로 그들을 공격하였고 불붙은 짚단을 장갑차 안으로 던져 넣으려 했다.

이에 장갑차 내부에 있던 장교가 M16소총으로 장갑차 뚜껑을 열던 시민에게 공포탄 사격을 했는데

이때의 사격으로 공포탄에 맞은 김영찬(19세)이 대퇴부에 부상을 입었다.

 


같은 날, 광주시민 김안부(36세)가 전두부 열상 등으로 사망했다.


5월 20일 - MBC 방송국 방화와 경찰관 사망 사건

5월 20일이 되자 아래의 유언비어가 적힌 유인물이 나돌았다.

 

 

1. 죽은 인원이 수십명이다

2. 공산당도 이렇게 무자비하지 않았다

3. 계엄군이 경상도 출신이다

 

 


시위대는 MBC 방송사에 광주에서의 사태를 방송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이날 뉴스에서도 역시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기사가 방영되지 않자

분노하여 방송국에 화염병을 투척하여 방송사가 화염에 휩싸였다.

 

 


한편, 노동청 앞에서는 시위대와 경찰들이 대치하고 있었는데

고속버스 1대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파할 목적으로 돌진하여

경찰관 4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버스를 몰았던 김갑진, 배용주는


군중들이 버스를 탈취, 몰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여 버스를 몰았는데

운전 도중 연기 등으로 앞이 보이지 않아 버스를 멈췄더니 사고가 났다고 진술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광주 소요 사태가 격화되자 20사단의 증파를 결정했다.

 


5월 21일 - 계엄군의 실탄 사격과 시위대의 광주 장악

20사단의 광주 증파가 결정되자 20사단은 부대이동을 하여 광주에 도착하였는데

사단 지휘차량 인솔대가 광주공단 입구에서 시위대의 화염병 공격을 받게 된다.

여기서 그들은 시위대에게 사단장 지프차 등 지휘차량 14대를 탈취당한다.

 

 

 

그동안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함구하던 정부는 이 날 최초로 광주 민주화 운동 발생에 대해 발표한다.

 

지난 18일 오후부터 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았다


20일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각종 유언비어가 유포되어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가세함으로써 사태가 악화되었다 21일 오전 7시 현재 군경 5명과 민간인 1명이 사망하였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평온을 회복하도록 모든 대책을 강구하겠다

 

 


또한, 사태의 조기 진압에 실패한 책임을 들어


윤흥정 전교사령관이 해임되고 후임에 소준열 전교사령관이 임명되었다.

 

 

 

한편, 시위대는 사체 2구가 실린 수레를 앞세우고 공수부대의 만행을 규탄하며 계엄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사태 해결을 위해 장형태 전라남도 도지사와의 면담을 요구하였는데

장형태 도지사가 시위대 앞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마이크를 설치하는 도중

도지사가 광주시장인 구용상에게 "먼저 나가서 시위대를 진정시켜달라"고 하였다.

 


시위대는 도지사가 아닌 광주시장이 나타나자

"도지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며 흥분하여 화염병과 각목을 던졌고

결국 전남도지사는 시위대 앞에 서 연설을 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대신 장형태 도지사는 헬기를 타고 직접 방송을 하기에 이른다.

"계엄군이 철수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으니 시민 여러분은 해산하고 생업에 종사해달라"

 


이에 시위대는 오전 12시가 될 때까지 계엄군이 광주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계엄군은 철수하지 않았고, 이에 시위대는 계엄군의 저지선을 돌파할 목적으로

버스를 몰아 계엄군 저지선으로 돌진을 감행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최초 실탄 사격이 발생한다.

사격 명령자는 없었으며 이들은 시위대의 버스 돌진 공격으로 자위권을 발동한 것이었다.

 

 


이 사격으로 버스 운전사가 사망하였고 시위대는 "계엄군이 총격을 가했다"고 주장하며

전남 도처에 위치한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 무장하였고 무기 사용 교육을 실시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시민군'이라 불리우는 무장시위대의 출범이었다.

 

 

 

시민군은 계엄군과 총격전을 시작하였으며 LMG기관총을 이용하여

전남도청과 해산을 종용하는 군 헬기 등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시위대가 무장을 하고 계엄군과의 총격전까지 벌어지자

전교사는 계엄군을 전남도청에서 철수시켜 광주 외곽으로 이동시켰으며

시위대가 전남도청을 장악한다.

 


계엄군이 철수하는 도중 시위대가 총격과 차량 돌진 공격을 감행하여

군 차량 3대가 전복하였고 군인 2명이 사망, 6명이 부상을 당했다.

 

 


국무총리인 신현확은 사태의 책임을 지고 국무총리직에서 사임했다.

 


5월 22일 - 시민수습위원회의 출범과 시민군 내부의 갈등

이날, 전남도청에서는 사태의 해결을 위하여 시민수습위원회가 출범하였다.

그들은 광주 시내에서 철수한 계엄군 본부에 찾아가 사태 해결을 위해 협상을 한다.

 


요구사항은 "군의 과잉 진압을 인정하고 사후 보복하지 않으면 무장 해제 하겠다"는 것이었다.

군은 "모든 문제는 무기를 반납한 후에 논의될 수 있다"고 하였고 연행하였던 848명을 석방했다.

 

 


수습위원회는 협상 결과를 전남도청의 시위대에게 보고하면서

"무기는 무조건 반납할 수 밖에 없다"고 하자, 시위대는 반발하며

이들의 협상 결과가 미온적이고 굴욕적이라며 야유를 보내며 무기 반납을 거부했다.

 

 

 


정부측에서는 사태의 해결을 위해 신현확의 사퇴로


국무총리 서리를 하게 된 박충훈이 광주에 방문하여 특별담화를 녹음한 후 상경했다.

 

 


5월 23일 - 계엄사의 진압 작전 논의와 총기 반납 논쟁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진압 작전을 논의하면서 북괴 개입설을 제기했다.

"광주 소요 사태에는 가발 사용자와 복면한 자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북괴의 침투를 의심케 하는 상태"

 

 

 

시민군은 시위 도중 사망한 시위대 사체 58구를 전남도청에 전시하였고

시민군 사이에서는 무기 반납 문제를 두고 논쟁이 오고 갔다.

 


온건파는 여태껏 회수한 총기 3,000여 정 중 200정을 우선적으로


계엄군 본부에 방문하여 반납하였으나 그 후에는 강경파의 제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5월 24일 - 계엄군 간의 오인사격과 간첩 이창용

이 날, 광주 외곽에 배치된 계엄군들 간에 오인사격이 다수 발생하였다.

 


매복하고 있던 계엄군들이 아군을 시민군으로 오인하여 사격하고,

공격받은 계엄군은 이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교전이 발생한 것인데

아군 간의 오인사격으로 인해 군인 12명이 사망하였다.

 


오인사격으로 격분한 공수부대는 체포한 시민군 1명과

시민군으로 오인된 마을 청년 3명, 하수구에 숨어있던 50세 여성에게

총격을 감행하여 사망하게 하였다.

 

 


한편, 전남도청의 온건파는 계엄군 본부에 방문하여 협상을 벌였고

계엄군 시내 진입 금지, 과잉 진압 인정, 연행자 석방, 사태 후 처벌 금지 등을 약속받고

시민군에게 결과 보고를 하며 무기를 반납하라고 호소하였으나...

 

 


강경파는 온건파의 요구를 묵살하고 오히려 자유성토대회를 열어

전두환 화형식을 개최하고 가두행진을 하며 무기를 반납하지 않았다.

 

 


한편, 서울에서 북괴 간첩 이창용이 검거되었는데 경찰은 아래와 같이 발표했다.

 


간첩 이창용이 남해안에 침투, 광주에 들어가 선동 및 분란 행위를 하려 하였으나

계엄군의 검문 검색으로 포기하고 특급열차로 서울역에 도착하여 배회하다 검거되었다

 


※훗날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이창용이 첩보 행위의 목적으로 침투한 북괴 간첩이 맞지만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선동 행위'라는 침투 목적은 신군부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한다.

 

 


5월 25일 - 전남도청 독침사건과 최규하 대통령의 광주 방문

전남도청의 시민군 중에 장계범과 정향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은 시민군에 의해 북괴 간첩으로 오인받게 되었다.

 


이에 장계범은 "독침에 맞았다"고 주장하며 쓰러졌고

정향규는 장계범을 차량에 태워 전남도청을 빠져 나간다.

 


그들은 후일, 유언비어 날조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2년형에 처해진다.

 

 

 

 


최규하 대통령은 사태의 수습을 위해 광주로 향했다.

광주에 도착한 최규하는 "내가 직접 전남도청으로 가 시민들을 만나보겠다"고 하였으나

소준열 전교사령관을 비롯한 관료들이 이를 극구 만류하여 호소문을 녹음 한 뒤 상경한다.

 


다 같은 국민 사이에 대화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으며

최대한 관용을 베풀고 불문에 부칠 것이니

냉정과 이성을 되찾아 사태를 수습합시다.

 

 


5월 26일 - 전남도청 TNT 제거와 온건파의 도주

이 날, 전교사 교관 4명이 전남도청에 잠입하여 TNT와 수류탄 496발의 뇌관을 제거했다.

사진에 나와있는 배승일 씨는 이 날의 공로로 훈장을 받게 되지만 훗날 박탈당했다.

그러나 소송을 통해 훈장을 되찾아 명예를 회복했다.

 

 

 

전남도청에서는 온건파가 아래와 같이 주장하며 무기를 반납하자고 주장했다. "진압작전시 대항하는 것은 엄청난 피해만을 야기할 뿐이므로 무기를 반납하고 의연히 처벌받자"

 


그러나 강경파인 윤상원과 박남선 등이 최후 항전을 주장하였고

무기 반납을 주장하는 온건파를 총으로 위협하였으며 온건파는 전남도청에서 빠져나와 도주한다.

 

 

 


시민군은 계엄군의 공격이 임박한 것을 알고 각지에 배치되었고

전남도청의 민주시민투쟁위원회 홍보부 소속 박영순, 이경희가


광주시내를 돌며 시민군에게 전남도청으로 와 시민군에 합류하는 방송을 하였다.

 

 


5월 27일 -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압

계엄군은 새벽에 전남도청을 기습 공격하여 저항하는 시민군과의 교전을 벌였으나

쏜살같이 진압에 완료하고 전남도청을 점령함으로써 광주에서의 작전을 종료한다.

 


이 날, 진압작전으로 인해 시위대 17명이 사망하였고

시위대 295명이 체포되었으며 계엄군 3명이 사망하였다.

 

 


그 후

광주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군인 23명, 경찰 4명, 민간인 166명 등 모두 193명이 사망했다.

 

 

 

 

훗날 최규하가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전두환이 대통령에 선출되는데

 

 

 

 


레이건의 당선으로 공산주의의 소멸을 주장하고 있던 미국은

한국에서의 혼란을 원치 않았기에 전두환 정부를 인정하고 협력관계를 결성한다.

 

 

 

 


5.17비상계엄확대조치로 인해 체포되어 연행된 김대중은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배후 조종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요청으로 형 집행 정지 처분을 받았으며


1982년 12월, 석방 후 미국으로 망명한다.

 

 

 

 

 

박정희 정권의 2인자이자 박정희 사후 유력한 대선 후보였던 김종필은

부정 축재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6월민주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이 될 때까지 그는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다.

 

 

 

 

김영삼은 신군부에 의해 정계 은퇴 선언을 강요받아 은퇴 선언을 하였으나

김대중이 체포되었다가 미국으로 망명하고, 정부의 일부 인사의 정치 활동 금지가 일부 완화되자

정계에 복귀하여 6월민주항쟁 발생 이전까지 야당 활동을 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1985년 5월 23일, 서울에 위치한 미국 문화원을 기습으로 점거하여

"광주 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사과하라"며 농성을 벌였다가 26일 자진해산,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들은 "5.18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을 미국이 인정한 것"을 이유로 들어 시위를 벌인 것이었다.

이 날의 농성 사건에는 현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정청래도 참여했었다.

 

 

 

한국의 민주화를 주장하며 미국을 동반자로 생각했던 일부 학생들은

미국이 전두환 정부를 인정하자 반미(反美)성향을 띠게 되었고

한국의 민주화에 필요한 동반자를 '북한'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NL이라고 분류되는 주체사상파가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6월민주항쟁의 결과로 직선제가 부활하고

노태우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곧 치루어진 총선에서 패배하여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고, 결국 노태우는 야권의 압력에 굴복하여 5공청문회를 개최하게 되는데

전두환이 국회에 출석하였다가 초선 의원이었던 노무현이 명패를 던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노태우 대통령을 거쳐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군부 인사들의 정치가 끝나고 민주화 인사가 정권을 잡게 된다.

 

 

 

 


이에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에 체포되었던 정동년은

전두환, 노태우 등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을 검찰에 고소하였는데

검찰은 12.12사태와 5.18광주 민주화 운동, 5공화국 인사들을 소환하여 조사한 결과

전두환, 노태우 등에게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려 처벌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의 바탕이 되는 수사보고서는 이 때 작서되었으며

계엄군의 최초 실탄 발포 당시 사격 명령자는 없었던 것으로 발표되었고 광주 민주화 운동 초기 유포된 유언비어의 출처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검찰의 발표에 여론은 들끓어 올랐고

때마침 발생한 노태우의 비자금 사건이 화제가 되자

그 사건에 연루되어있던 김영삼은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 수감하여 처벌하기에 이른다.

 


전두환은 사형선고를 받고 노태우는 징역 17년에 처해졌으나

 

 

 


제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당선되자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이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특별사면을 시행하여 두 사람은 석방되었다.

 

 

 

최규하는 훗날 정부기관에서 12.12사태와 5.18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조사를 할 때

증인으로 출석받을 것을 요구받았으나 조사가 끝날 때까지 끝내 출석하지 않았으며

그는 사망할 때까지 위 사건들에 대한 증언을 하지 않았다.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주영복 국방부장관은 5.18 재판 당시


5.17비상계엄확대조치에 깊게 관여한 것이 인정되어


징역 7년형에 처해졌으나 역시 사면됐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의 31사단장이었던 정웅은


"광주 민주화 운동의 무력진압을 막으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고 주장하였으며 김대중의 평민당 소속 국회의원을 지냈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사망한 시민들은 광주 망월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며

 

 


계엄군 및 경찰들은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 28묘역에 안장되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계엄군과 경찰, 시민들 모두에게 가슴 아픈 상처를 남겼다.

 


다시는 이러한 불미스러운 역사가 되풀이되지를 않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참고한 자료

1. 1997년 서울지방검찰청, 군 검찰부 5.18 수사보고서

2.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5.18 수사보고서

 


이 글은 수사보고서의 원문을 근거로 하였으나 가독성을 위하여

계엄군의 배치도와 각 날짜마다의 사망자 명단을 요약하였음


"정치성향을 배제해 최대한 중립적으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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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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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정파)

최근 수정 시각: 2022-03-11 17:45:51
 
 
 
 
학생회의 계파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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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의 계파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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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형성3. 분파
3.1. 제파PD3.2. 제독PD3.3. NL좌파+AP+ND(일부)+AF(일부) → 21C3.4. ND+AMC(일부)+AF(일부) → 범 PD
4. 노동운동, 진보정당 진출5. 사상6. 현황

1. 개요[편집]

80년대 중반 성립되어 NL과 더불어 대한민국 운동권을 양분하던 두 조류 중의 하나. 민중 민주주의 혁명(People's Democracy Revolution,PDR)을 주장하며 형성되었기에 PD(민중민주파)로 불리웠다.

민족 문제를 중시해 북한과 힘을 합쳐 미 제국주의를 축출할 것을 핵심 과제로 보았던 NL과는 달리, 우리 사회의 핵심 문제를 계급문제로 보고 노동운동과 연계하여 자본주의를 극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80년대까지 소련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추종했으나, 소련 해체 이후에는 다양한 사회주의 흐름으로 이론과 실천 방식이 분화되었다. 심지어 북유럽식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로 전향한 사람들, 이론 연구에 집중한 사람들, 다양한 신좌파 이론들을 받아들인 사람들, 심지어는 아예 보수로 전향한 경우도 있다.[1]

현재는 정의당 등의 진보정당이나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운동단체, 다양한 시민사회단체 등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다.

2. 형성[편집]

조직이나 이론의 형성이 NL보다 늦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운동권의 원형이 해방 이전부터 형성된 민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었는데다가, 일제강점기의 토착 공산주의자들은 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죄다 월북하거나 전향을 택한 바람에 이어갈 만한 계통도 없었고, 결정적으로 70년대까지는 사회주의 운동의 기반이 될 도시노동자층의 형성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80년 광주"라는 충격 이후 우리나라를 어떻게 변혁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진지하게 대두되는데 우리나라의 근본 모순이 어디서부터 기인하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사회구성체 논쟁이 활발하게 벌어지게 된다. 여기서부터 운동노선이 크게 갈라지게 된다.

노동운동에 투신한 70년대 중후반 학번들이 PD의 조상이라고 여겨지는데, 노회찬이 소속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과 심상정 김문수의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이 대표적이다.[2] 인민노련과 서노련 등의 노동운동 선배 그룹의 영향을 받던 학생 운동가들 사이에는 NL에 맞서는 이념을 정립하기 위한 활발한 사상 논쟁이 계속되었다. NL은 남한이 미국의 식민지라 정상적인 자본주의로 발달하지 못한 봉건사회라 주장했는데, PD는 이를 비판하고 경제적 종속이 이루어진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신식민지)이며 남한은 봉건사회가 아닌 멀쩡한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 물론 그 형태는 국가가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고 제어하는 국가 독점 자본주의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 이들은 종속이론을 받아들이고 NL의 미국 제국주의론을 비판적으로 인정하면서[3] 중요한 것은 독점 재벌의 해체와 이를 통한 혁명이라고 보았다.

3. 분파[편집]

북한이라는 이상사회가 명확하게 존재하고, 통큰 단결을 중시했던 NL과 달리, 소련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노선을 바탕으로 했던 PD는 원전 해석과 정세 분석에 따라 다양한 분파가 나타났고, PD 계열 내부의 논쟁(소위 '사상투쟁')도 활발했다. 90년대 초 소련의 해체 이후에는 더욱 다양하게 분화하여 무수하게 많은 조직들로 나누어졌다.

3.1. 제파PD[편집]

반제 반파쇼 민중 민주주의를 주장하던 그룹. 민민투 내 다수파인 제헌의회그룹에 대한 반발로 생긴 PDR계열 민민투 내 소수파로 출발하였다. '다산-보임모임' 이라는 노동운동 조직에 의해 설립되었다. '선언' 조직이라 불리는 AP그룹과 '반파PD'라 불리는 AF그룹으로 나뉘었다. 90년대 초에는 PD그룹의 주류였으나, 각 지역 노동 현장조직과 관계를 맺으며 소규모로 발전하였기에 큰 흐름으로 이어지지 않았는데, 세력이 약해지면서 다른 PD계열 쪽으로 넘어간 사람들이 많았고, 남아있는 세력들은 '노동자의 힘', '사회변혁노동자당' 등 노동 현장을 기반으로 한 전위 정당 노선을 고수하며 현장파를 구성하였다.

3.2. 제독PD[편집]

'현실과 과학'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던 소장파 마르크스주의 학자들과 노동현장에서 활동하던 '노동계급(LC)'이라는 정파의 영향을 받던 학생운동 그룹으로, NDR내 비 NL파들이 형성한 정파이다.

3.3. NL좌파+AP+ND(일부)+AF(일부) → 21C[편집]

인민노련을 비롯한 노동운동 조직들을 기반으로 한 합법 진보정당 건설 노선[4]을 따르던 학생그룹은 92년 '진보학생연합'(진학련)을 설립하고 서울시립대, 이화여대, 연세대를 비롯한 10여개 대학 총학생회를 수권한다. 이들은 92년 총선에서 민중당, 대선에서 백기완선본에 결합했고 94년 비주사 NL그룹[5]과 통합하여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을 결성한다.[6]

3.4. ND+AMC(일부)+AF(일부) → 범 PD[편집]

92년 대선에서 '사퇴 없는 민중 후보로 대선 투쟁을 정면 돌파'를 주장하던 일부 학생운동가들[7]은 '전국학생연대'(약칭 전학련, 학생연대)를 조직하여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일명 자인공)'를 주장하며 '코뮨주의'를 표방한 학생운동을 주장하였다. 사회당으로 결집했기에 사회당계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들은 NL그룹과 명확하게 대립각을 세웠다. 다른 PD그룹과 민주노총이 중심이 된 국민승리21 창당 때도 NL그룹이 참여한다며 반대[8] 청년진보당을 결성하였고, 99년에는 한총련에 대항하는[9] 학생회 운동 연대체인 '전국학생회협의회'(전학협)을 결성하였다. 2000년대 초반 이들은 수도권에서 상당한 위세를 자랑하였고, 기존의 AMC계열이 주도하던 전학투위(전국학생투쟁위원회)[10]에서 떨어져나와 별도의 전학투위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2002년 사회당 대선 참패 이후 사회당-전학협 내의 치열한 논쟁 이후 전학협은 스스로 해소한다.[11] 해소이후 전학협 주류그룹은 대학생사람연대- 청년좌파(너머) 등으로 이어졌고, 사회당-기본소득당에서 활동했다.

어째서인지 제파PD 계열로 오해받는 일이 잦은데, 이는 제파PD 성향 학생운동 단체가 없어서 그런 듯. 제파PD 운동권 중 AP는 NL좌파와 손잡고 21C를 창설했고, AF는 21C와 ND로 쪼개져 들어갔다.

4. 노동운동, 진보정당 진출[편집]

PD계열 학생운동가들은 노동 현장으로 투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민주노동당에서는 민주노총 중앙파와 함께 의견 그룹을 형성해 평등파, 범좌파로 불리우며 NL계열-민주노총 국민파가 연합한 자주파와 대립하였다. 자주파의 민주노동당 완전 장악 이후에는 진보신당으로 분당해 나가고, 이후 통합진보당, 노동당으로 나누어졌다가 심상정, 노회찬으로 대표되는 사회민주주의 경향 대다수는 정의당으로 합류한다.

제파PD계열은 지역 노동현장 중심으로 소그룹을 형성해 민주노총 현장파를 형성하여 급진적 노동운동을 추진하였다. 민주노동당에서 정의당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의회주의, 개량주의라 비판하며 노동자의 힘-사회변혁노동자당 등의 전위정당 운동을 이어 나간다.

ND를 중심으로 AMC와 AF의 일부를 흡수한 전학련-전학협 계열은 NL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환경운동, 장애인운동, 아르바이트노동자 운동 등에 집중하여 알바노조를 주도하였다. 청년진보당-사회당-기본소득당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주도하였다.

5. 사상[편집]

과거 NL과 PD, 그리고 PD끼리 치고받고 싸웠던 것은 대개 한국 사회의 갈등 구조와 그 원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관점이 달랐기 때문. NL은 기본적으로 한국의 정부든 대기업이든 기본적으로 미국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하수인에 불과하므로, 미국을 몰아내고 자주적 통일을 이뤄야만(NL) 근본적인 변혁(PDR)이 가능하다고 보았다.[12] 그렇다고 해서 PD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안 외쳤던 것은 아니다. 다만 21세기의 주한미군 주둔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북한뿐 아니라 중국[13]과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압박 카드로 사용된다는 점에 좀 더 주목하고 있다.

PD도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의 존재 등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한국 사회는 이미 자체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어, 미국의 정치/경제/군사적 원조[14] 없이도 독자적인 생존/재생산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미 한국에서 국가와 자본의 지배가 어느 정도 견고하게 자리잡았으므로, 사회 내부의 계급 모순을 해소하는 것이 더 주요한 과제라고 본 것.[15]

그러나 세상 일이 그렇듯 이들의 주장이 모든 면에서 서로 갈리기만 하는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국가보안법 폐지 같은, 진보 진영의 대표적인 의제에 있어 비슷한 의견을 보이기도 한다. NL이 노동 이슈에 대해 함구하는 것도 아니며, PD가 북한과 미국 헤게모니 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다.[16] 멀리 갈 것도 없이 경기동부연합이 NL진영에서 노동문제를 본격적으로 주목하기 시작한 세력이다.

국제 정치에 대한 인식 면에서 PD는 NL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비판들도 있다. 그러니 PD계열이 북한을 비판한다고는 해도, 국제 정세 상에서 중대한 사건이 터졌을 때 취하는 입장은 제 3자의 시각에서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관련기사, 관련기사

6. 현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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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PD계열의 숙원이었던 합법 진보정당 민주노동당이 원내 진출에 성공한 이후 짧았던 영광은 잠시.. 이후 NL이 민주노동당을 장악하며 PD 출신들은 쫓겨나다시피 진보신당으로 분당하고, 여러가지 논란 끝에 통합진보당으로 재결합(잔류파는 사회당과 함께 노동당 형성) 이후 정의당으로 재분당 하는 등 파란만장한 시간들을 보내며 PD계열 자체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많이 상실되었다.

이합집산의 과정에서 정의당으로 집결한 대부분의 PD 출신의 성향은 의회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 성향으로 우경화되었고[17] 일부 노동조합과 지식인층의 지지는 남았지만 민주노동당 전성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향력이 축소되었다. 그러나 2014년 통합진보당 위헌정당해산 사건 이후 NL계열이 정치계에서 아예 공중분해되는 바람에 다시한번 유일한 원내 진보정당 정의당에게 기회가 왔다.

20대 총선에서 노회찬, 심상정, 여영국이 지역구에서 당선되며 재기의 불꽃을 지폈고, 21대 총선에서는 지역구에서는 심상정 의원만 생환에 성공하나, 정당지지율 9.67%를 기록하며 NL계열의 민중당(1.05%)은 완전히 압도하게 된다.

2020년 9월 정의당 제6기 전국동시당직선거 당대표 선거에서 대장정 그룹 출신 김종철 후보가 NL계열 인천연합의 지지를 받는 배진교 후보를 결선투표에서 55.57%이라는 큰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정의당, 노동당 외에도 더불어민주에 박용진 등 소수의 PD출신 정치인들이 있다.
[1] 친이계 좌장이 된 이재오, 친박까지 가버린 김문수 등. 이해찬이 "좌절하면 변절한다"라고 한 것처럼 이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이 아니라, 소련의 붕괴라는 큰 사건으로 그들이 믿었던 확고한 믿음과 그들이 가졌던 세계관이 무너졌다는 것이다.[2] PD와 이들이 선후배 사이이고 친연성이 있는 것은 맞지만 노회찬, 김문수, 심상정 등은 80년대 학번 세대보다 이른 70년대 학번 세대에 가까우며 학생운동보다 노동운동을 중시한 이들로 학생운동의 독자적 역할을 강조했던 PD 주류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오히려 이들이 가까워진 것은 2000년대 진보정당이 출현하며 민주노동당에서 함께 당 운동을 하면서라고. 심지어는 노동운동과 학생운동 노선을 두고 선후배간의 치열한 공방이 있기도 했다고.[3] 물론 맥락은 좀 다르다. NL(자주파)의 제국주의는 민족의 통일을 가로막는 악에 가까운 반면, PD(평등파)가 규정하는 제국주의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제국주의론에서 언급한 자본주의의 최종 진화 형태에 가깝다.[4] 노회찬, 주대환 등이 주축이 되었다. 당시에는 급진성, 선명성을 중시하던 다른 PD계열 그룹들에게 합법주의, 개량주의라고 무지하게 까였다[5] CA의 후신이다.[6] 이후로는 레닌주의 노선에서 완전 이탈했기에 PD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NL주류와는 대립했기 때문에 범좌파로 분류되기도 하고, 아예 비운동권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7] 민민투-CA소수파로 이어지던 ND의 흐름, 제파PD 내 AF 잔류그룹, AMC 탈퇴파 등 다양한 정파가 합류하며 초정파 운동을 주장하였다. 참고로 이름이 비슷한 진학련은 NL좌파+ND+AP의 조합.[8] 이후 민주노동당과 합당 논의가 나올 때도 계속 조선로동당 반대를 표방할 것을 주장하였다.[9] 이들은 NL 내부를 개혁해 이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끌고가야 한다는 주류 PD의 입장에 반대하며 애초에 한총련에 참여하지 않았다.[10] 5월 1일 노동절을 맞아 공동 투쟁과 전야제를 준비하던 PD계열 학생운동 연대체[11] 당시의 충격이 굉장했던지 해소에 반대하는 활동가 중 일부는 정신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12] 이러한 관점의 배경에는 미국(주한미군)의 지원 없이는 한국의 정부 체계나 경제 구조가 금방 붕괴할 것이라고 보는 시선이 깔려 있다. NLPDR 문서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 참조. 그래서 지금도 NL의 핵심적인 주장 중 하나가 주한미군 철수인 것이다.[13] 미국 국채의 반 정도를 사들이면서 경제적으로는 재정적자를 누적하고 있는 미국과 큰 연결을 갖는 반면에, 독자적인 군사력을 유지, 강화해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과의 헤게모니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14] 협력이 아니다. 퍼준다는 의미의 원조[15] 피디론의 주요 골자가 되는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 자체가 남한은 이미 고도의 자본주의 국가라는 의미였다. 이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대한 문화적 충격도 한 몫했다.[16] 단 그렇다고 '민족' 통일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말하는 건 잘못된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PD는 민족주의가 내포하는 보수성을 비판하기 때문이다.[17] 제파PD 진영에서는 주로 이점을 비판한다. 민노당 시절 PD들은 NL계열이 민노당의 강령에서 사회주의를 삭제하려 시도할 때 반대했었는데, 정작 진보신당부터는 강령에는 사회주의가 들어가지 않았다고.. 이후 참여계 사회자유주의 세력이 합류하며 더욱 비판받는중.